지난 9일 문화공동체 인문학습원의 막걸리학교 2기 강좌는 접수 시작 7분만에 마감됐다. 1주일에 한 번, 두 시간 강습 및 실습 10회에 36만원이지만 40명 정원은 1기에 이어 또 순식간에 다 찼다.
막걸리학교의 최시명(48) 대표는 "지난 1기에는 일본에서 비행기로 건너와 수업을 들은 재일교포도 있었다"며 "수강생들 대부분이 40대 이상의 장년층으로 은퇴 후 작은 막걸리바를 갖고 싶어하는 이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1기 수강생 길종각(47)씨는 "수요일마다 대학생 아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강좌를 듣는다"며 "아들이 막걸리 빚는 솜씨가 있으면 고향에서 도주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 2009년, '신종 막걸리 바이러스'에 전염된 한국사회
휴일이었던 지난 13일 밤 10시 50분. 서울 은평구의 한 대형마트 1층 막걸리 코너에는 한 부부가 망설이고 있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는 전중렬(39)씨는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막걸리 종류가 다양해서 어떤 제품을 살지 고민하게 된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막걸리는 28종류. 부부는 5분 정도 여러가지 막걸리 병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서로 다른 종류의 제품 3병을 카트에 넣었다. 이날 매장에는 막걸리를 카트에 담은 '막걸리안'이 10명에 두셋 꼴로 눈에 띄었다.
신세계 홍보실 장민진씨는 "이마트 전 점포 기준으로 작년 12월에는 12종류의 막걸리를, 올 12월에는 41종류를 판매하고 있다"며 "하루 평균 매출도 5백만원에서 4천1백만원으로 1년 만에 급증했다"고 말했다. 한국 전통주 동호회 '국술'의 최상균(29) 부매니저는 "새로운 막걸리가 나오면 동호회에서 시음회를 갖는다. 최근 막걸리 종류가 다양해지고 회원들의 반응도 좋아 2주마다 갖던 모임을 매주 하기로 했다"고 막걸리의 인기를 전했다.
막걸리의 인기는 소비자 뿐 아니라 생산자의 증가로도 입증된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전국의 막걸리업체는 530여 곳. 국세청 소비세과의 오홍기 세무조사관은 "올해 12월 현재 막걸리업체 758여곳과 막걸리상표 1230여개가 국세청에 신고되었다. 막걸리 업체와 상표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 막걸리의 酒생역전
2009년은 막걸리가 촌부(村夫)의 술에서 건배주로 신분 상승을 이룬 한 해였다. 막걸리가 처음 건배주가 된 것은 지난 8월 24일 서울에서 열렸던 '2009 공학 교육연구 국제학술회의'의 갈라디너. 이 자리에서 막걸리는 '드래프트 막걸리'라는 이름으로 참가자들의 잔에 담겼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웨이터들이 막걸리 병을 하얀 천으로 감싸 참석자들 앞의 샴페인 잔에 따랐다. 기포가 송송 솟아오르는 미색의 생막걸리를 보고 외국인들은 'milky wine'이냐며 신기해했다.
또 지난 10월 9일 열린 한일정상회담의 청와대 오찬 때는 자줏빛 고구마막걸리가 건배주였다. 내년 11월 한국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건배잔을 막걸리로 채우자는 논의도 공공연히 진행 중이다. 국순당의 고봉환(40) 마케팅팀장은 "막걸리를 건배주로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문의가 하루에 1~2번씩 들어온다."며 "생막걸리의 경우 샴페인처럼 도수가 낮고 청량감이 있어 건배주로 제격."이라고 말했다.
기존 막걸리보다 수십 배 비싼 프리미엄 막걸리도 등장했다. 700mL들이 '이화주' 1병과 도자기 잔 2개로 구성된 국순당 이화주 선물세트의 단가는 8만원. 보통 1300원에 팔리는 '서울탁주'의 750mL들이 '장수막걸리'보다 60여배 비싸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주류코너의 정경대(27) 주임은 "구매 전 예약이 필요할 정도로 고가의 막걸리 선물세트가 인기"라며 "지난달 초에는 삼성전자에서 외국인 바이어에게 선물하겠다며 13세트를 사갔다."고 귀띔했다. 국내 주류판매 1위인 하이트·진로그룹 역시 지난 10일 해외수출용 고급 막걸리를 개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 딸은 '칵테일막걸리'에 빠지고 아버지는 '하우스막걸리'에 취하고
대학생 김지수(23)씨는 수업 후 종종 친구들과 학교 근처 주점에서 막걸리를 즐긴다. 김씨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칵테일막걸리. 김씨는 "막사이사이주(막걸리+사이다)는 구식이고 요즘에는 막소사(막걸리+소주+사이다)가 대세다. 도수는 소주로, 톡 쏘는 맛은 사이다로 조절한다"고 했다.
막걸리 전문 프랜차이즈 '뚝탁' 신천점의 윤혜미(28) 점장은 "젊은 여성들이 생막걸리에 과일을 갈아 넣은 '칵테일 막걸리'를 선호한다. 상큼한 키위막걸리와 달달한 복숭아막걸리가 단연 인기"라고 말했다. 홍익대 근처의 막걸리바 'W8'은 막걸리에 와인을 블렌딩한 '와인막걸리', 에스프레소샷을 추가한 '에스프레소막걸리', 녹차가루를 첨가한 '녹차막걸리'로 손님들을 끈다. W8의 이재욱(43) 대표는 "와인바에서 막걸리바로 바꾼 지 1달 반 되었는데 매출이 3배 늘었다. 보통 하루에 막걸리가 750mL짜리 기준으로 150병씩 사용되고, 좌석 80석이 다 차 손님을 못 받을 때도 많다"고 말했다.
신세대가 칵테일막걸리에 빠져 있다면 장년층은 '하우스막걸리'에 취해 있다. 서초구의 정치은(58)씨는 얼마 전 송년 모임에 집에서 빚은 막걸리 12병을 가지고 갔다. 지난 10월 하우스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한 후 7번째 작품이다.
지난달 28일에 밑술을 담가 지난 10일에 걸러낸 이 막걸리에 대해 정씨는 "바디감이 가벼워서 점심에도 부담없이 마셨다. 친구들이 맛을 보고는 다들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우고 싶어했다"고 맛을 전했다. 또 그는 "술을 빚다보면 어릴 때 외할머니가 막걸리에 덧술하시던 모습, 막걸리 주전자 심부름하면서 몰래 한 모금씩 홀짝홀짝하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누룩 제조회사 '송학곡자'의 정성문(54) 대표는 "집에서 막걸리를 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누룩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작년보다 매출이 2배 가까이 늘었다"고 밝혔다.
국순당 전통주 연구소 신우창(41)부소장은 "우리 민족에게는 막걸리 DNA가 있다"며 "막걸리 열풍이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와인처럼 체계적 연구와 스토리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정통 막걸리 자체의 맛이 다양해지고 품질이 과학적으로 관리되어야 소비자들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