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그룹 빅뱅의 G-드래곤(Dragon)이 노래한다.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아. 아직 쓸만한걸. 죽지 않았어."('하트브레이커·Heartbreaker' 중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다. 그래도 이 정도 가사는 요즘 대세라는 '걸 그룹'에 비하면 겸손한 편이다.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진 않아, 나는 예쁘니까."(씨야의 '여성시대')

"너보다 잘록한 허리 쫙 빠진 매끈한 다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 항상 핫 이슈"(포미닛의 '핫이슈')

"스키니한 바디라인과 눈부신 내 미소, pretty sweety sexy, 모두 바라보는 난 스타"(레인보우의 '가십걸')

"잘빠진 다리와 외모 너는 내게 반하지, 내 앞에선 니 모든 게 무너지고 말걸"(애프터스쿨의 'AH')

일일이 예를 들기 숨이 벅찰 정도다. 2009년 가요계를 휩쓴 신세대 아이돌 그룹의 히트곡 가사는 하나같이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가사뿐만이 아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히트곡 'Abracadabra'의 안무인 '시건방 춤' 이라는 도도한 춤은 "널 내가 갖겠어,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라는 자기도취적 가사와 무척 잘 어울린다.

이제 겸양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 대중가요가 이별의 아픔, 헌신적 사랑, 삶의 애환 등의 '겸손한' 주제로 일관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사의 범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 아이돌 그룹은 트렌드를 잡아내고 그것을 문화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는 기획사의 작품이다. 그들이 내놓은 곡에 공통적인 주제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2009년의 아이돌 그룹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당당하고 자기애가 강한 세대'의 자신감이다. 그들의 히트곡은 모두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 있게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신세대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애로 똘똘 뭉친 나르시시스트 소비자들이 이런 당찬 가사에 환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굶어 죽었다는 나르키소스처럼, 스스로에게 도취된 소비자가 늘고 있다. 젊은이들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방문해 보라. 제멋으로 살면서 자신의 감정과 일상을 놀랍도록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사랑에 당당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으며, 그러한 자신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데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가히 자기 자신에게 중독됐다고 부를 만하다. '셀프-홀릭(self-holic·자신에게 중독됐다는 의미)'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발랄하고 뜨거운 문화 코드다.

실제로 올 한해 불황으로 많은 분야가 침체를 겪었지만, 셀프-홀릭족을 겨냥한 개성 강한 상품은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더 세련되게, 더 효과적으로, 더 개성 있게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에는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올여름에는 '아프리카 룩'이라고 일컬어지는, 화려하고 강렬한 스타일이 패셔니스타의 조건이었다. 화려한 프린트, 과장되고 커다란 액세서리, 글래디에이터 슈즈 등 예전 같으면 아무나 시도하기 힘들, 지나치게 화려한 듯한 디자인이 각광받았다. 여간한 자신감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운 패션이다.

자기에게 도취된 신세대 나르시시스트 소비자가 늘어나는 것은 여러 가지 시대적 변화에 기인한다. 이들은 '개인'으로 자라난 첫 세대다. 형제가 적어 어릴 때부터 방을 혼자 썼고, 성인이 돼서도 하숙이나 룸메이트보다는 원룸을 선호한다. MP3플레이어·핸드폰·PMP 등 개인화된 기기로 무장하고, 온라인 게임을 하며 혼자서 논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소비 문화의 세례를 받은 행운아들이다. 요즘 아이들을 가리켜 '여섯 주머니(one mouth, six pockets)' 세대라고 부른다. 아이 하나에, 엄마·아빠·할머니·할아버지·외할머니·외할아버지가 용돈을 준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여기에 돈 많고 시집 안 간 고모와 이모가 합세해 '여덟 주머니'로 늘었다. 조카에게 고급 물건을 사 주는 고모·이모가 많아져서 아예 '골든 앤트(golden aunt)'라는 조어가 생길 정도다. 이처럼 온 가족의 지원 속에 풍족한 소비를 누려온 세대가 '나는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당당한 세대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상 최악의 취업난을 맞고 있다. 한껏 높아진 자존심을 채워주기에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성사회의 높은 벽, 그 아래에서 젊은이들은 셀프-홀릭 상품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달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름과 물 같아 보이는 아이돌 그룹의 자기도취와 가수 장기하류의 '루저(loser) 문화'는 서로 묘하게 닿아있다.

우리는 좀 더 자신감이 필요한 세상을 살고 있다. 무한 경쟁 속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도 이겨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나와 너의 경계가 확실해지는 것이다. 견고할 것 같았던 사회적 믿음이 거부당하고, 신뢰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며, 자존심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상처 입을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어설픈 겸양과 양보를 버리고, 더 당당하게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처럼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당당해지고 싶은 자애적(自愛的) 욕망은 없어서는 안 될 자기 치유의 에너지다. 팍팍한 현실에서 오는 좌절감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를 토닥거려주는 위안 기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끝을 모르는 이상향을 향해 질주하며, 오늘보다 내일 더 열심히 경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독하고 외로운 경주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자기로의 지향은 필연적이다.

이제 산업은 이처럼 강한 개성과 자기애로 호된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나르시시스트 소비자의 가치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에고노미(egonomy·개인을 위한 경제라는 의미)' 시대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