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하얀 바람개비들이 가득하다. 바람의 힘으로 전기를 만드는 풍력발전소의 모습이다. 항공기 조종사에게 풍력발전소는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지상관제소는 레이더로 항공기 위치를 파악해 항로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레이더는 풍력발전소 상공을 나는 항공기와 풍력발전기의 회전날개에서 나오는 신호를 구분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항공기를 놓친다. 지상관제소에서 정보를 받지 못한 항공기는 말 그대로 길 잃은 양 신세가 된다. 최근 영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기술이 나왔다. 풍력발전용 회전날개를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게 해주는 스텔스(stealth) 기술이다.
◆날개 위에서 레이더파 사라져
레이더는 레이더파가 물체에 부딪혔다가 돌아오는 것을 포착해 움직이는 물체를 알아낸다. 회전날개가 빠르게 돌면 지상의 레이더는 최대 시속 200㎞의 항공기가 날아가는 것으로 오인한다. 영국의 군수업체인 키네티큐(QinetiQ)는 지난달 말 노퍽 지방에서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길이 44m짜리 풍력발전용 스텔스 회전날개를 공개했다. 레이더에서 일반 회전날개는 항공기처럼 표시됐지만, 스텔스 회전날개는 레이더 반사파의 신호 세기가 훨씬 약해 항공기와 구분됐다.
풍력발전산업 세계 1위인 덴마크 베스타스(Vestas)와 함께 개발한 스텔스 회전날개는 스텔스 전투기와는 원리가 다르다. 스텔스 전투기는 레이더파를 흡수하는 특수 페인트를 사용한다. 하지만 수십m 길이의 회전날개를 스텔스 페인트로 칠하면 날개 무게가 많이 늘어난다. 5㎜ 두께로 페인트를 칠하면 대형 회전날개의 경우 추가되는 무게가 1.2t에 이른다. 그만큼 날개가 잘 돌지 못해 발전(發電) 효율도 떨어진다.
키네티큐는 기술 보안을 이유로 스텔스 회전날개의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다만 베스타스의 복합소재 전문가인 스티브 애플턴(Appleton)은 "스텔스 페인트를 칠한 것이 아니라 회전날개 자체를 스텔스 기능을 갖게 디자인했다"며 "스텔스 회전날개는 솔즈베리 스크린(Salisbury screen)과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밝혔다.
1952년 미국의 엔지니어인 솔즈베리가 개발한 솔즈베리 스크린은 레이더파를 소멸시키는 물질이다. 솔즈베리 스크린은 두 개의 층으로 이뤄져 있다. 표면에 있는 물질은 일반 물체처럼 레이더파를 반사한다. 동시에 아래층에 있는 금속판도 레이더파를 반사한다. 두 반사파는 물체 위에서 서로 상쇄돼 사라진다. 따라서 레이더는 반사파를 받지 못해 물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스텔스 회전날개에 부딪힌 레이더파 역시 두 개로 반사되면서 서로 상쇄돼 사라진다고 추정할 수 있다. 베스타스는 내년부터 스텔스 풍력발전용 회전날개를 시험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레이더 오류 막을 소프트웨어 개발
세계 각국은 풍력발전용 회전날개로 인한 레이더 오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영국 정부는 최근 항공업체의 반대로 5기가와트(GW·1GW는 10억와트) 발전용량의 풍력발전소 건설을 보류했다. 미국연방항공국(FAA)도 레이더 오류 문제를 들어 매사추세츠주에 130기의 회전날개가 들어설 풍력발전소 건설 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한 가지 해결책은 풍력발전소 상공을 지나는 항공기에 인식용 라디오파 송신장치를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면 회전날개로 인한 신호와 항공기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대형 항공기나 전투기는 이렇게 할 수 있지만, 풍력발전소 상공을 낮게 나는 수많은 경량항공기는 라디오파 송신장치를 달고 있지 않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스텔스 기술 역시 한계가 있다. 지난달 실험에서 키네티큐는 레이더파 반사율을 몇 퍼센트 감소시켰다고 밝혔다. 기술이 발전하면 감소율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로선 실용화를 말하기엔 이르다고 볼 수 있다. 또 스텔스 회전날개는 파장이 짧은 레이더파엔 효과적이지만 파장이 길어지면 효율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다른 방법은 레이더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지난달 군수업체인 레이시온 캐나다(RaytheonCanada)사와 850만달러의 레이더 기술 향상 프로젝트 계약을 맺었다. 레이시온사는 레이더파 처리 알고리즘을 바꾸는 소프트웨어에서 답을 찾고 있다. 즉 반사돼 온 레이더파가 실제로 움직이는 물체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풍력발전소의 회전날개나 기상관측용 기구처럼 고정된 물체에서 온 것인지를 소프트웨어로 구별하는 것이다. 이 소프트웨어는 단파장뿐 아니라 장파장 레이더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레이시온사는 2011년까지 알고리즘 개발을 마치고, 전 세계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자사의 항공기용 레이더에 장착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