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 하나로 밀어붙인 현대ㆍ기아차의 급성장 뒤에는 정몽구 회장의 드러나지 않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있다.
선이 굵은 리더십과 무뚝뚝한 카리스마 이면에 의외의 인간미와 자상함이 엿보인다.
근면과 성실은 사업가, 경영자의 오랜 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쉼 없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성과가 나올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머뭇거리는 순간 뒤처지는 것이 경쟁시대의 법칙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경영자 중에는 의외로 여유가 지닌 놀라운 힘의 진가를 아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불도저식 '뚝심 경영'으로 정평이 나있는 정몽구(71) 현대·기아차 회장도 그런 경영자다. 정 회장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가 좌우명일 만큼 부지런함으로 손꼽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보다 '여유의 힘'을 아는 승부사다.
퇴촌 별장의 비밀
알려진 대로라면 정 회장은 현장을 불시에 방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꿀 것을 지시하는 스타일이다. 참모진의 만류에도(사실 그를 말릴 참모는 거의 없지만) 된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불 같은 성격에 '여유'란 말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성난 호랑이상을 하고 있는 정 회장의 얼굴은 늘 상기돼 있으며, 고령과 육중한 체구와는 달리 움직임이 빠르다. 현장을 시찰할 때면 언제라도 불호령을 내릴 준비가 돼 있는 장군처럼 성큼성큼 걷는다. 그런 정 회장에게 일말의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정 회장 리더십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대규모 공장을 짓거나 신차를 개발하는 등 경영상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여유를 찾고 깊은 사색에 빠진다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퇴촌 별장은 정 회장이 즐겨 찾는 여유와 사색의 공간이다. 그곳은 전 세계를 누비며 숨 가쁘게 현장을 시찰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고, 새로운 구상을 위해 재충전하는 혼자만의 비원(Secret Garden)이다. 어쩌면 빌 게이츠가 매년 여름휴가 때마다 외부와 단절하고 '생각하는 주간(Think Week)'을 보내는 미국 서북부 호숫가 별장에 필적할 만하다. 퇴촌 별장은 원래 선친 정주영 회장이 쓰던 곳이다. 정 회장이 현대차 경영을 맡은 2000년 초, 그는 이곳에 나무를 많이 심어 조경을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실무자들은 언덕에 정 회장이 좋아하는 소나무도 심고 꽃과 새를 키울 수 있는 온실도 만들었다.
비원이 완공되던 날, 실무진은 '정 회장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걱정이 컸다. 그러나 막상 결과를 본 정 회장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 회장을 감동시킨 것은 혹시나 싶어 만들어놓은 산책길이었다. 정 회장은 그 후로 출장이 없는 주말이면 퇴촌으로 들어가 혼자서 몇 시간이고 산책을 하며 경영 구상을 하곤 한다.
혼자 거니는 산책길에서 외롭게 피어 있는 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마치 꽃을 사랑한 '어린 왕자'처럼. 그는 소나무를 유독 좋아한다. 몇 시간을 거닐다 소나무가 우거진 벤치 아래 다다르면 그곳에 기대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다. 표정도 자세도 더없이 평화롭고 한가롭다. 그것을 목격한 어느 지인은 "마치 옛 한국화에서 봤음직한, 산중을 호령하며 용맹을 떨치던 호랑이가 산중 소나무에 기대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는 풍경을 연상했다"고 말했다.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글로벌 기업이 되었겠는가. 이름도 없던 현대자동차를 세계 6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키운 그의 뚝심과 자신감은 퇴촌의 여유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측근들의 얘기로는 정 회장은 어려운 순간마다 퇴촌을 찾는 일이 잦았고, 그때마다 대체로 추진하는 일이 잘 풀렸다고 한다.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는 세계 72위. 그야말로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미국의 빅3는 '과거', 도요타가 '현재'라면 현대는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현장 경영'하면 정몽구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정 회장은 이른바 'GT 5(글로벌 탑 5)'를 목표로 품질을 최우선 과제로 국내는 물론 미국·유럽 공장까지 발걸음을 재촉해 온 대표적인 경영자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경영 스타일 탓에 정 회장이 파워워킹을 추구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걷는 데 더욱 심취한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산책할 여유도 없는 사람은 생각할 여유도 없다. 산책하는 불도저는 그냥 밀어붙이는 불도저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누가 그를 냉정하다 하는가
정 회장의 인사 스타일은 냉정하고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랫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불호령을 내리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해고할 만큼 성격이 급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현대차 인사는 예고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고들 한다. 정 회장 취임 후 현대차 비자금 사건 전까지 옷을 벗은 임원이 수백에 달한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도 있다. 심지어 해고에 앙심을 품은 퇴출자가 비리 사실을 제보했다는 추측까지 나돌았을 정도다.
정 회장의 인사 스타일만 놓고 본다면 그가 인정(人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결코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남다른 인정이 있다는 사실은 여러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가정에서 그는 따뜻한 사람이다. 1980년 중반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삼을 구해 아버지 밥상에 올린 아들도 정 회장이다. 정주영 회장의 생전 숙원사업이던 일관제철소를 짓기 위해 동분서주한 것도 정 회장이다. 경남 하동에서의 일관제철소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자 '철(鐵)의 눈물'을 흘리고 마침내 당진에 현대제철의 꿈을 실현하기까지 내달려온 것도 선친의 못다 이룬 꿈 때문이었다. 현대제철은 내년 1월부터 400만 톤 규모의 고로 1기 운전에 들어간다.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에 대한 애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손자들에게도 넘치는 정을 보여주는 할아버지다. 집에 손자들이 온다고 하면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행여 손자들이 뛰어놀다 다칠세라 식탁과 책상의 모서리란 모서리는 다 직접 솜과 테이프로 감싸 붙일 정도로 세심한 정성을 쏟는다.
정몽구 회장은 가족뿐 아니라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평소 대중 앞에 나서 연설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면서도 신입사원 하계수련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해 강의를 하고 새내기들과 악수하는 것이 전통으로 굳어졌을 정도다. 정 회장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을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새내기 사원들에게 "신차 1대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디자이너·마케팅 담당자 등 수많은 인재가 밤을 지새워야 한다"며 "누구 하나라도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고장 난 차처럼 경영 목표에 이를 수 없게 된다"고 강조한다. 정 회장의 인재관은 '자동차는 무려 2만 개의 부품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영하 40도의 혹한에서도, 영상 60도의 폭염 속에서도 제대로 동작한다'는 '자동차론'과 맥이 닿아 있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버리다
불도저란 별명에 무뚝뚝한 이미지인 정몽구 회장도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예술에 섬세할 만큼 조예가 깊다. 자동차 품질 못지않게 디자인에 대한 식견이 있기도 하지만, 자연을 모티브로 한 건물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다. 양재동 사옥 안에 야자수를 심어 수목원처럼 꾸며놓은 인테리어도 정 회장의 지시로 완성된 작품이다. 공사 당시 정 회장이 직접 현장에 나와 거의 하루 종일 감독했을 정도다. 현대차의 예술 지원 활동 브랜드인 'H·art'가 탄생한 것도 정 회장의 예술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의지에 따라 '현대차와 현대미술'이란 주제로 순회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본사 로비에 개관한 상설 전시공간인 '양재 아트리움'에서는 다양한 예술문화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정 회장은 음악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예전 한 임원이 색소폰에 소질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회식 때마다 재즈 연주를 청해 감상하곤 했다고 한다. 자동차는 예술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게 정 회장의 지론이다. 그는 "더 나은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창조적 의지는 예술적 창조력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풍류를 아는 불도저인 셈이다.
정 회장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나름대로 골프를 즐긴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다. 핸디를 줄이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어서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승부에 집착하는 골프가 아니라 잠시라도 여유 있는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운동과 취미 정도로 여기고 있다. 가끔 제주도 해비치 골프장을 찾곤 한다.
겉보기에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선이 굵은 장수처럼 진두지휘하는 장군 같지만, 정 회장은 의외로 내성적인 사람이다. 대외적으로 나서 연설을 한다든지, 언론과의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그래서 어눌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어눌한 것이 아니라 말을 아끼는 것이다. 말을 앞세워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매순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선호한다.
현대·기아차의 급성장을 두고 초기에 해외 언론은 정몽구 회장의 '독단'을 비판했다. 심지어 미국 경영전문지 는 '정몽구 회장의 과속 경영이 현대·기아차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Speed kills)'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불과 몇 년 새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실적으로 입증했다.
정 회장은 전 세계를 돌며 여수엑스포 유치에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고도 정작 성사 후에는 자세를 낮추었다. 유치전이 한창일 때 정 회장의 행보를 일거수일투족 알려온 현대·기아차도 개최지가 발표되는 순간, 모든 엑스포 관련 홍보를 중단했다. 물론 정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여수시가 주최한 엑스포 유치 기념 행사장에서도 정 회장은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여수엑스포 유치에 모든 일을 주도한 것처럼 부각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의 겸손은 변화를 향한 열정과도 맞물려 있다. 그는 사내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스스로 '꽃'과 '강'이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라." 그의 카리스마는 독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직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