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허벅술’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6월 1일 제주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에서 3종의 국산 술이 제공됐는데 그중 허벅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보해양조의 ‘매취순 백자 12년산’은 건배주로, 허벅술은 롯데주류BG의 ‘설화’와 함께 만찬주로 채택됐다.

이들 3종류의 술 중에서 매취순은 지명도가 높고 설화도 비교적 알려진 반면 허벅술은 상대적으로 생소한 술이다. 도대체 어떤 술이기에 대한민국이 각별히 신경쓰는 행사인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만찬주로 채택됐을까? 이 술을 만찬주로 채택한 숨은 공로자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다. 유 장관은 “제주에서 열리는 국제행사인데 제주 전통주를 정상들께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 1일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 허벅술이 만찬주로 제공돼 호평 받았다. photo 조선일보 DB

허벅술은 희석식 소주인 한라산소주를 만드는 제주도 향토주류업체 ㈜한라산에서 1995년부터 시판하고 있는 증류식 소주다. 원료는 곡식을 쓰며 쌀, 현미, 보리를 섞지 않고 단일 원료로 각각 만든다. 세 종류가 있는 셈이다. 첨가물은 올리고당과 아스파라긴이 들어가며 3~5년 오크통에 숙성하고나서 병입하기 직전에 제주 천연 유채꿀이 소량 들어간다. 도수는 현재 35도짜리와 25도짜리 두 종류가 있다. 35도 짜리의 경우 720㎖ 용량에 소비자가격이 2만5000원이다.

허벅술이 국제행사에서 만찬주나 건배주로 채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 술은 시중에 첫선을 보인 이듬해인 1996년 제주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한·일정상회담에서 건배주와 만찬주로 데뷔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일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허벅술을 매우 좋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시모토 술’이라는 별명과 함께 유명세를 탔다.

또 2000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제주를 방문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 일행을 위한 만찬주로 사용됐으며 2003년 제주에서 열린 남북평화축전과 2005년 12월 열린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도 만찬주와 건배주로 채택됐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허벅술은 2006년과 2007년 대한민국 우수특산품 대상을 2년 연속 수상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주류품평회(IWAC)에서 은상을 받아 세계적인 명품주로 인정 받았다.

허벅술이 예전부터 제주도에 있던 술은 아니다. 비슷한 술은 있었다. 허벅술이 전통소주인 증류식 소주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등장한 희석식 소주와 달리 전통시대의 소주는 예외 없이 증류식이었다. 제주는 안동, 개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소주 명산지의 하나에 속할 만큼 증류식 소주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제주에는 오랫동안 몽골군이 주둔했는데 증류식 소주 자체가 몽골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허벅술은 ㈜한라산 현승탁(玄丞倬·63) 회장이 제주소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 만든 술이다. 13대째 제주도에서 살아오고 있는 토박이인 현 회장은 3대째 술을 만들어오고 있다. 현 회장의 조부인 현성호씨(작고)가 창업주다. 1950년 호남양조장이란 이름으로 창업했는데 탁주와 재제주를 만들었다. 당시 말로 이른바 ‘술도가’ 중의 하나인 셈이다. 현 회장은 어릴 때부터 술에 둘러싸여 자랐고 자연스럽게 술을 만드는 것을 가업으로 여기게 됐다.

제주제일고와 경희대 경영학과를 나온 현 회장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탁구선수였던 그는 중 3때 제주 최초로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고2 때도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대학에서는 탁구부 주장을 2년이나 맡기도 했다. 당시 경희대 탁구부는 강팀이었다. 윤상문 탁구협회 기술위원장이 탁구부 2년 후배다. “가업이 양조업이 아니었으면 탁구선수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는 대학 졸업 후 탁구를 접고 주류회사 경영인으로 변신한다. “대학 들어가면서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부친 현정국씨가 운영하던 주류회사에 전무로 입사해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았다. 전무로만 24년을 근무하다 1992년 부친의 뒤를 이어 3대째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 후 회사의 주력 분야인 희석식 소주 히트작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취임 이듬해인 1993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념의 희석식 소주 ‘한라산’을 내놔 히트를 쳤다. 이 소주는 병 색깔을 녹색에서 흰색으로 바꿨다. “당시 일본소주는 우리처럼 녹색병을 쓰지 않고 흰색병을 쓰더군요. 흰색으로 바꾸면 원가는 25~30% 더 들어가지만 용기가 깔끔해 보이는 장점이 있습니다.” 위스키나 와인처럼 뚜껑 아래에 띠지를 둘러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다. 또 한자로 산(山)자 모양의 글자를 병 상단부 사면에 양각으로 새겼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희석식 소주가 저렴하기는 하지만 용기까지 싼 티 나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용기뿐만 아니라 맛도 개선했다. 순하고 부드럽고 깨끗한 맛을 더 살렸다.

한라산소주는 해외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출시 원년인 1993년 일본으로 수출했고 이듬해는 미국으로, 1995년에는 브라질로 수출됐다. 현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의욕적으로 신제품을 내놨다. 1996년에는 백록담, 1997년 한라산물 순한소주, 1998년 과일주용 소주를 선보였다. 끊임 없는 신제품 출시와 품질 개선에 힘입어 한라산소주의 제주도 시장점유율은 높은 성장세를 이어갔고 최고 95%까지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는 89% 수준이다.

현 회장은 희석식 소주와는 별도로 대표이사 취임 전인 1990년부터 증류식 소주 개발에 착수했다. “제가 어릴 때는 우리 회사에서 보리, 고구마로 증류식 소주를 만들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정부 양곡정책 때문에 희석식으로 바꿨지만 술 만드는 사람으로서 전통술을 복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기술자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우리 회사가 증류식 소주를 만들 때는 광주 등 호남지역에서 기술자를 초빙해서 숙식을 제공하면서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30년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 분들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증류식 소주 만드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술자와 함께 현장을 방문해 배웠다. 국내에서는 최대 주정회사인 경기도 안산의 진로발효와 국세청 기술연구소 등에서 배웠고, 소주 강국 일본에서도 명산지인 오키나와와 가고시마 등을 여러 번 방문했다. 5년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995년 증류식 소주 ‘허벅술’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일부 증류식 소주 제품의 단점으로 꼽히는 역한 냄새를 없애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담백한 맛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허벅술이 최근 검사들 사이에서 폭탄주 뇌관으로 인기 있는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뛰어난 수질의 덕도 많이 봤다. 그는 제주도가 세계 최고의 술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제주도의 천연암반수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술맛을 좌우하는 요소가 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주 술은 천혜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허벅술을 개발한 현승탁 ㈜한라산 회장.

정감 어린 ‘허벅술’이라는 이름도 현 회장이 직접 지었다. 허벅은 제주도에서 물을 길어 나르던 동이를 말한다. 현 회장은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제주대학 박물관에도 자주 들렀는데 거기서 술허벅 용기를 보고 영감이 떠올랐다고 한다. “옛날에 제주도에서는 술병을 술허벅이라고 했는데 이 허벅을 살려 이름도 붙이고 용기도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용기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애당초 허벅술 개발에 착수할 때부터 목표가 세계적 명주 개발이었기 때문이다. 용기는 허벅의 모습을 본떠 도자기로 제작했다. 제주도에서는 원하는 조건의 도자기를 만들 수 없어 경기도 여주군 소재 동천요에서 제품을 공급 받고 있다. 허벅술 글씨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낸 서예의 대가 고(故) 소암 현중화 선생의 작품이다.

그는 허벅술을 선보인 데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다양화하고 있다. 처음 선보인 35도짜리 제품에 이어 2007년에는 25도로 도수를 낮춘 ‘허벅술 순’도 출시했다. 현 회장은 “하시모토 총리가 35도짜리 허벅술을 마시고 얼굴이 빨개진 상태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정상회담용 술은 독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순한 술 개발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이번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특별히 제작한 18도짜리 허벅술을 제공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동남아는 날씨가 더운 지역이어서 독주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두 달 전 만찬주 선정 통보를 받고 나서 도수를 대폭 낮춘 허벅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18도짜리 허벅술의 반응이 좋아 조만간 시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도수의 허벅술 개발 외에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숙원사업이 있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발렌타인 30년처럼 오래 숙성시킨 원액으로 허벅술을 만드는 것이다. “중국에 50년을 숙성시킨 우랑예 술이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현재는 15년 정도 된 허벅술 원액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50년 숙성시킨 원액으로 ‘허벅술 30년’ ‘허벅술 50년’을 만들어 세계적 명주 반열에 올려놓는 게 목표입니다.”

전통 제주소주를 복원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육성하려는 그의 소원은 세월이 필요한 탓에 아무래도 다음 대에서나 이뤄질 듯하다. 다행히 장남인 현재웅(32) 전무가 부친의 뜻을 받들어 4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맹렬히 경영수업 중이어서 가능성은 높다. 현 회장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술을 되살리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3주간 8개 공정 거친 뒤 오크통서 3~5년 숙성… 알콜 35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허벅술.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증류식 소주인 허벅술은 크게 나눠 8가지 공정을 거친다. 우선 세미 및 침지 공정이다. 원료(쌀, 현미, 보리)를 세척하고 수분을 침투시켜 잘 쪄질 수 있도록 한다. 다음은 증미 및 냉각. 증미기에서 쌀을 찌고 적정온도로 냉각시킨다. 자동제국 공정에서는 자동제국기에서 종국을 파종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 후 42~44시간 누룩을 만든다.

다음은 발효 공정. 제국미에 정제수와 효모를 첨가해 1차, 2차 발효과정을 거친다. 증류 공정에서는 발효액을 단식증류기에 넣고 진공상태로 해서 감압증류를 한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20~22일이다. 다음으로 냉동여과 공정을 거치는데 증류 원액을 0℃ 이하에서 여과해 기름성분 및 이물질을 제거한다. 숙성저장은 허벅술의 술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공정이다. 술 원액을 오크통에 넣어 3~5년 숙성시킨다. 최종 단계는 완제품으로 포장하는 병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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