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 정자동 KT 사옥 10층에 있던 '혁신기획실' 사무실에는 요즘 다른 팀 간판이 걸려 있다. 혁신기획실은 한때 소속 직원이 30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자 사내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팀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조직 개편 때 팀 자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이 팀 직원 중 20명은 대부분 일선 전화국 등 영업직이나 다른 부서로 배치됐다.
이뿐 아니다. 사업협력실과 사업지원실이 통합되면서 두 부서 직원 20명도 일선 영업 현장에 배치됐다. 이 과정에서 H모(36)씨의 경우, 중앙 정부를 상대하던 업무를 맡다가 하루아침에 일선 전화국에서 전화·초고속인터넷 가입 유치를 담당하게 됐다. H씨는 "당혹스럽고 힘들지만 회사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 조직원들은 더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KT는 이런 식으로 본사 인력 6500여명 중 3000명을 현장으로 배치했다.
극심한 글로벌 경제한파 속에서 끝까지 생존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기업들의 생존 몸부림이 본격화되고 있다. 본사의 책상 수천 개를 한꺼번에 없애면서 조직이 통폐합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 수석연구원은 "기업들이 IMF 외환위기 때는 인적 구조조정을 많이 했는데 부작용이 작지 않았다"며 "그것을 경험 삼아 최근엔 기업들이 사업과 조직, 시장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의 파고를 넘으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쪼개라! 합쳐라!" 사업 재편 활발
동양제철화학은 지난달 2일 자동차용 원료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을 생산하는 해외 자회사 컬럼비안케미컬의 지분(66.75%) 전량을 사모펀드에 매각하기로 했다. 매각대금은 3년 전 인수가격(2520억원)보다 훨씬 적은 1889억원. 600억원 이상 손실을 감수했다. 이런 손실에 대한 시장 반응이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시장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관련 법인을 과감히 포기하고 신성장 동력사업인 태양광에너지사업에 집중 투자할 여력을 마련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LG화학은 창틀·벽지·바닥재 등 산업재 부문을 떼내 오는 4월 'LG하우시스'라는 이름으로 분사하기로 했다.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산업재 부문과, 기업 대상인 석유화학 부문은 사업 특성상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새 사업 기회를 포착하고 개별 사업을 통합해 새 회사를 출범시키는 곳도 있다. 삼성은 삼성전자와 삼성SDI의 휴대기기용 디스플레이(화면표시장치) 사업을 하나로 합친 삼성모바일 디스플레이를 지난달 출범시켰다. 두 회사는 그동안 비슷한 성격의 소형 기기용 디스플레이사업을 해왔다. 삼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차세대 조명인 LED 분야에서 삼성전자·삼성전기 간 합작 법인을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삼성전기는 LED사업을 발굴해왔고, 삼성전자는 LED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 기술과 장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두 회사의 중복 투자를 막고 시너지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한화 역시 최근 계열 제약사인 메디텍을 관련 계열사인 드림파마로 합병하는 등 중복 회사 조정작업을 진행 중이다.
◆제품 구성도, 시장도 바꾼다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2열연공장은 최근 롤러에서 뽑아내는 판재류 두께가 훨씬 두꺼워졌다. 섭씨 1200도 정도로 달궈진 슬래브(두꺼운 철판 형태의 철강 중간소재)를 압착시켜 보통 10㎜ 안팎의 열연판재를 뽑아냈으나 최근에 뽑아져 나오는 판재 두께는 20㎜가 넘는다. 교량·건축 자재 등으로 열연판재 소비가 크게 위축되자 선박 건조용 후판으로 대체 가능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 국내 대형 조선업체는 일감이 밀려 있는 상태라 수요가 꾸준하기 때문이다. 가격은 싸지만 수요처가 확실한 제품 생산량을 늘리는 식으로 제품 구성을 재편해 불황을 뚫겠다는 전략이다.
IMF 외환위기 때와 달리 이번 경기 침체는 아시아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행돼 수출시장 전반이 침체돼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한파가 덜하거나 상대적인 미개척 시장이 있다. 기업들은 그런 시장을 뚫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거액의 연봉을 주고 최대 경쟁 기업인 노키아의 인도 마케팅 담당자를 스카우트했다. 인도에서 노키아는 휴대폰시장을 60% 이상 장악하고 있는 절대 강자. 적의 '핵심 장수'를 빼내 적을 공략하는 데 활용하겠다는 포석이다.
LG전자는 올해 중동과 아프리카 시장을 집중 공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근 마카오에서 중동·아프리카 지역본부의 주요 거래선 300여명을 초청해 '중아(中亞) 콘퍼런스'를 갖고 해당 지역 특화형 휴대폰 출시 방안을 집중 논의하기도 했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 시장이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반면, 중동과 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덜해 개척할 여지가 많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조명현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의 변신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며 "기업들이 현장 강화, 스피드 경영, 신속한 합종연횡과 변신을 얼마나 기민하게 하느냐에 따라 생존과 도태가 극명하게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