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위기가 깊어지고 있지만 이런 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작은 기업들이 있다. 독자적인 기술로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글로벌 강소(强小)기업들이다. 거대 기업의 틈바구니에서 성공하고 있는 강소기업들을 통해 기업생존 노하우와 지혜를 배운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있다. 기업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도전의식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5216번 실패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영국 다이슨(Dyson)사는 5217번째 시제품에서 성공한 가정용 진공청소기로 지난해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하며 매출 1조4000억원을 넘어섰다. 1993년 창립 후 불과 15년 만에 거둔 놀라운 실적이다.

5216전 5217기

창립자인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61) 회장은 영국 왕립예술대학 출신의 디자이너다. 수륙양용차와 정원용 수레 디자인으로 각종 디자인상을 휩쓸던 다이슨은 1979년 집에서 청소를 하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100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돼온 진공청소기는 먼지봉투로 먼지를 빨아들인 뒤 봉투째 버리는 방식이었다. 다이슨은 청소기가 자꾸 막히고 흡입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가 먼지봉투가 막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다이슨은 우연히 들른 목재소에서 답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원심분리기로 공기를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 톱밥을 걸러냈다. 공기가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면 무거운 물체는 밖으로 밀려난다. 다이슨은 1979년부터 5년간 무려 5127개의 시제품을 제작한 끝에 원심분리기를 장착한 먼지봉투 없는 최초의 진공청소기를 개발했다.

첫 제품은 디자인 전문 잡지의 표지에 소개될 만큼 성능뿐 아니라 디자인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다이슨은 이 제품의 판권을 대형 청소기 업체에 넘기고 디자인 일을 계속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장은 냉담했다. 먼지봉투 판매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을 올리던 청소기 업체는 이 청소기를 외면했다. 당시 다이슨은 시제품 제작에 전 재산을 쏟아 붓고 파산 직전이었다.

영국 다이슨사 제임스 다이슨 회장이 자신이 개발한 원심분리형 진공청소기를 들고있다.

디자인과 기술로 승부

다이슨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1985년 일본의 한 회사로부터 첫 구매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진공청소기는 영국 디자인전에 출품되고 일본 국제디자인박람회에서 상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3년 다이슨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사를 세워 본격적인 시장공략에 들어갔다. 첫 제품은 불과 18개월 만에 영국 내 판매 1위 청소기가 됐다. 2005년 조사에 따르면 영국 가정의 3분의 1이 다이슨의 청소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난해 다이슨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19% 성장한 6억1100만 파운드(한화 약 1조4000억원). 영업이익은 8900만 파운드(약 2000억원)나 됐다. 2002년에는 미국 시장에도 진출해 2년 만에 당시 시장의 절대 맹주였던 후버사의 제품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현재 다이슨의 진공청소기는 전 세계 45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미국·영국과 유럽·호주·뉴질랜드·캐나다·일본 등지에서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4년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했던 수출은 현재 80%까지 올라왔다.

다이슨이 성공한 첫째 요인으로는 기술력이 꼽힌다. 다이슨은 영국 본사와 말레이시아 공장 등 전 세계에 200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이 중 다이슨 본사 직원의 3분의 1은 엔지니어다. 지난해 영업이익의 절반이 넘는 5000만 파운드(약 1150억원)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특허만 1300개에 이른다. 최근 개발된 청소기는 대기압의 15만 배에 이르는 힘으로 공기를 회전시켜 청소기에서 나오는 공기가 일반 가정의 공기보다 훨씬 깨끗하게 만들었다.

제품 다각화도 시도되고 있다. 최근에는 시속 640㎞의 공기 막을 이용해 물기를 말 그대로 긁어내는 손 건조기도 개발했다. 전력 사용량은 기존 제품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손을 말리는 속도는 10초 가량으로 기존 제품보다 두 배 이상 빠르다. 7년여의 연구 끝에 두 개의 드럼이 돌아가는 세탁기도 개발해냈다.

차별화된 글로벌 마케팅

독특한 해외 마케팅도 눈길을 끈다. 가장 먼저 제품의 현지화를 들 수 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는 집이 크고 두터운 카펫을 사용하는 점에 맞춰 제품의 내구성과 흡입력을 높였다. 일본 등 아시아시장에서는 제품 크기를 줄이면서도 흡입력은 그대로 유지한 제품을 선보였다.

다이슨은 해외 지사가 없는 곳에는 현지 유통업체를 통해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마케팅 전략은 동일하다. 현지 유통업체에 마진을 적게 주는 대신, 제품 런칭이나 전시회 참가 등 모든 마케팅 비용을 본사에서 지원했다. 제품 소개서의 문장 하나하나도 본사가 직접 확인해 모든 나라에서 단일한 제품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했다.

"도대체 누가 이 제품을 디자인한 거야"라던 한 디자이너의 불평이 지금 전 세계 소비자를 사로잡고 있다.

"소비자는 불황에도 기술력 가진 제품을 산다" 
제임스 다이슨 회장 인터뷰

"생활 주변의 물건을 보고 이 제품이 왜 이리 무거운지, 왜 전력소모량이 많은지 고민하다 보면 문제를 해결할 기술을 찾을 수 있고, 그에 맞는 디자인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다이슨 회장은 28일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생활 주변의 기기들이 제대로 그 기능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나의 기업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에서 거둔 수익을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재단을 통해 세상에 돌려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디자이너 출신답게 영국 내 700여 학교에 제품을 분해해보며 설계를 공부할 수 있는 학습도구를 제공했으며, 유방암·수막염·소아암 환자를 위해 수백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도 받았다.

―어떻게 청소기를 개발하게 됐나.

"사용하자마자 막히는 먼지봉투를 넣은 대기업 제품에 100년간 속아왔다는 데 대해 정말 화가 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나은 방식의 청소기가 있다면 후버나 일렉트로룩스가 이미 발명했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화가 나서 내 손으로 제대로 된 청소기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5216번 실패했을 때 그만두고 싶지 않았나.

"나는 실패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매번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웠고, 그것이 내가 해법을 찾는 방법이다. 두 개의 드럼으로 돌아가는 세탁기 개발에도 7년이나 투자했다."

―지금 세계 경제가 위기인데, 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구매 결정에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들은 더 나은 기술을 가진 제품에 돈을 지불한다. 다이슨의 첫 제품도 경제 불황 속에서 출시됐지만 소비자들이 기꺼이 구입했다. 새롭고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경기 기복을 이겨내는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