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다른 얼굴무늬를 가진 쌍살벌.

포유류나 조류, 어류, 파충류는 짝짓기를 하거나 집단생활을 할 때 상대의 생김새를 구별해낼 수 있다. 반면 고도의 사회생활을 한다는 개미나 벌은 여왕벌과 일벌처럼 각자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할 뿐, 각자의 개성은 철저히 무시된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미국 미시간대의 진화생물학자 엘리자베스 티벳(Tibbetts) 교수는 지난 22일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쌍살벌(paper wasp)은 한 번 싸운 상대는 일주일이 지나도 알아보고 다시 싸우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말벌과(科)에 속한 쌍살벌은 가정집 처마 밑에 집을 잘 짓는 벌로, 얼굴과 배에 오렌지색과 검은색 점과 줄이 나있다. 특이하게도 같은 사회생활을 하는 개미나 꿀벌과 달리, 누구나 싸움만 잘하면 여왕벌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벌집에서는 서열을 정하기 위한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

티벳 교수는 50개의 다른 벌집에서 한 마리씩 채집해 낯선 상대끼리 만나게 했다. 예상대로 서열을 정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다. 일주일 뒤 한 벌집에는 이미 싸웠던 벌들을, 다른 벌집에는 처음 보는 벌들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일주일 전 싸운 적이 있는 벌들은 평화롭게 지내는 반면, 처음 보는 벌들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열 다툼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큰 피해를 준다. 따라서 한 번 다툼을 벌여 서열이 정해진 상대와는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게 좋다. 얼굴을 기억하는 능력은 이런 필요에서 발달했을 것으로 연구진은 추정했다.

개미나 벌은 화학물질인 페로몬으로도 상대를 구별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티벳 교수는 2002년 한 쪽 쌍살벌은 원래 얼굴 무늬를 따라 물감으로 덧칠을 하고, 다른 쪽은 아예 다른 무늬를 그려 넣었다. 이때 무늬가 달라진 쪽이 동료들의 공격을 받았다. 물감이나 페로몬에 상관없이 얼굴 생김새로 동료를 구분한다는 말이다.

연구진은 "문장 끝에 오는 마침표 정도 크기의 뇌를 가진 벌이 이처럼 또렷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밝혔다. 동료 과학자들도 이번 연구가 사회생활 곤충의 기억력과 학습능력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