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MIT대학의 에릭 드렉슬러(Drexler) 박사는 1980년대 후반 '창조의 엔진'이라는 책에서 '나노기술(nanotechnology)'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는 10억분의 1m인 나노미터 단위에서 물질을 조작하는 나노기술이 수십 년 내 세상을 바꿔놓을 것으로 전망했다. 혈관 속을 헤엄쳐 다니며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로봇의 제조, 공기에 포함된 원소들을 조합해 금이나 석유를 만들어내는 분자기계의 탄생 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드렉슬러의 예언은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나노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크기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라 독특한 형태와 구조를 가진 나노물질의 개발이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영국의 과학대중지 '뉴사이언티스트(Newscientist)'지는 지난달 1일 나노기술에서 주목받고 있는 4가지 나노물질 연구를 소개했다. 이 중 3가지가 한국인 과학자가 제1저자로 참여한 연구논문이었다.
1. 메모리 소자 만드는 탄소나노튜브
미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의 지앙(Jiang) 교수와 강정원(35) 박사는 지난해 3월 탄소나노튜브 안에 또 다른 탄소나노튜브를 넣어 메모리 소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나노테크놀로지(Nanotechnology)'지에 발표했다.
두 겹의 탄소나노튜브 메모리 소자는 망원경을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전기적으로 중성일 때는 망원경을 완전히 접은 것처럼 안쪽의 나노튜브가 이동하지 않는다. 반면 전기를 흘려 주면 안쪽에 있는 나노튜브가 전기를 띠게 되면서 반대편 전극 쪽으로 움직인다.
안쪽 나노튜브가 바깥쪽 나노튜브의 중간에 있을 때를 0, 전극 쪽으로 이동할 때를 1로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소자가 가능해진다. 강정원 박사는 올해 충주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2. 태양전지 만드는 탄소 공
기존 태양전지는 실리콘 반도체로 만들어져 딱딱한 기판 형태만 가능하다. 반면 플라스틱 같은 고분자 물질로 태양전지를 만들면 자유자재로 휠 수 있어 설치되는 건물의 외부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지닌 태양전지가 나올 수 있다.
문제는 고분자 태양전지에서는 빛 알갱이(광자)가 태양전지와 부딪칠 때 튀어나오는 전자가 곧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데 있다. 이러면 전자의 흐름, 즉 전류가 생성되지 않는다.
지난해 7월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의 노벨상 수상자 앨런 히거(Heeger) 교수와 광주과기원의 이광희(38) 교수, 김진영 박사팀은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공 모양의 탄소덩어리 풀러렌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고분자 태양전지 안에 풀러렌을 점점이 박아 넣는 방식을 썼다. 광자가 고분자 태양전지를 때렸을 때 튀어나오는 전자를 풀러렌이 붙잡아 옆에 있는 다른 풀러렌으로 전달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자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전자의 흐름, 즉 전류가 형성된다. 이런 방식을 쓰면 기존 고분자 태양전지에 비해 30% 이상 효율이 높아진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3. DNA로 만드는 나노입자
드렉슬러가 예견한 대로 자기 조립이 가능한 나노물질도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노스웨스턴대의 채드 미르킨(Mirkin) 교수와 로체스터대의 박성용 박사는 '네이처(Nature)'지 표지논문에서 지름이 10나노미터 정도인 금 입자에 DNA 가닥을 붙여 스스로 조립하는 3차원 결정 구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DNA는 아데닌(A), 티민(T), 시토신(C), 구아닌(G) 4가지 염기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 아데닌은 티민과, 시토신은 구아닌과 늘 쌍으로 결합한다. 박 박사는 금 나노입자에 특정 DNA 염기를 붙여 그와 짝이 되는 나노입자(nanoparticle)와 결합하게 했다.
이를 테면 금 나노입자에 ATC 염기를 붙이면 그와 짝이 되는 TAG 염기가 붙은 금 나노입자가 달라붙는 식이다. 즉 금 나노입자 스스로 조립할 수 있는 설계도를 DNA가 제공하는 것이다. 금 나노입자는 인체에 무해하다. 금 나노입자로 만든 결정구조에 약물이나 센서 물질을 넣고 인체에 넣으면 질병치료나 진단이 가능해진다.
4. 마법의 지팡이 나노선
나노선(nanowire)은 지름이 수 나노미터 내지 수백 나노미터인 가늘고 긴 선(線) 구조물이다. 2006년 네이처지가 '물리학에서 주목받는 5개 분야' 중 하나로 선정했을 정도로 각광받는 연구 분야다. 뉴사이언티스트지는 나노선을 이용해 버려지는 열을 전기로 만들거나 휘어지는 플라스틱 칩을 제조하는 연구 성과를 소개했다.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탄소 원자들이 벌집처럼 육각형으로 연결돼 다발 형태를 이룬 것으로 구리보다 전기를 1000배나 잘 흘리고 강철보다 100배나 강해 차세대 전기전자 소재로 각광 받고 있다. 1991년 처음 발견됐으며 지름이 나노미터 단위다.
◆풀러렌(fullerene)=탄소 원자 60개가 서로 연결돼 공 모양을 이룬 것으로 1985년 처음 발견됐다. 속이 비어있어 약물이나 전자 전달체, 또는 원자·분자 단위 트랜지스터 등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