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북미국제모터쇼가 열리는 디트로이트 시내의 코보센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디어본(Dearborn). 미국 2위 자동차회사 포드(Ford) 본사가 있는 곳으로 미국 자동차산업의 발원지나 다름 없다. 디어본 본사 옆, 포드 100년 역사를 상징하는 복합생산시설 루지(Rouge) 공장을 모터쇼 기간 중 찾았다.

루지 공장은 현대차로 치면 울산공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곳이다. 디트로이트 강과 루지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루지 공장은 2.4㎢ 의 거대한 면적에 93개 건물이 들어차 있다. 1924년 완공돼 전성기 때 10만명의 근로자가 일하던 '자동차 왕국'이었다. 자동차 생산 뿐 아니라, 자동차 관련 제철설비를 모두 갖춰 '철광석만 집어넣으면 자동차가 나오게 만든다'는 포드의 창립자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의 꿈을 실현한 곳이다.

포드박물관에 있는 1980년대 토러스 개발 관련 전시품들.

그러나 이후 루지 공장은 강성노조의 득세로 생산성이 급감하는 등의 문제로, 경영진이 가동률을 크게 줄이면서 거의 폐허로 변했다. 2004년 포드 100주년을 기념해 일부 시설을 재가동했지만, 옛 영화(榮華)는 공장 옆 포드 박물관 내에 자취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포드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는 픽업트럭 'F-150'을 만들고 있으며, 고용인원은 5000명 정도다. 과거 포드의 자랑이었던 일관제철 설비는 외국 회사에 매각된 지 오래다.

현재 공장시설 대부분은 방치돼 있다. 디어본 주민인 로이 에반스(Roy Evans·73)씨는 "1950년대 중학생 시절 이곳에 견학왔을 때 루지 공장은 '미국 제조업의 힘' 그 자체였다"면서 "이젠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씁쓸해했다.

루지 공장은 1937년 노조와 경영진이 동원한 폭력배 사이의 유혈폭동이 일어난 뒤, UAW(전미자동차노조)의 권한이 크게 강화됐다. 이후 루지 공장은 미국 자동차 노조원 권익을 추구하는 선봉이었다. 포드가 속한 UAW는 자동차회사에 은퇴자에 대한 연금·건강보험까지 부담할 것을 요구했고, 수요가 줄어 공장가동률이 떨어져도 감원이 어렵도록 노사협약을 바꿨다.

포드 디어본 본사 근처의 루지 공장.

포드 재정상황이 좋았던 1990년대까지는 이러한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경영사정이 악화되면서 이런 노사관행은 회사 경쟁력 회복에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노조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끝없는 고용감소로 이어졌다. 지난 수년간 포드의 공장 근로자만 3만명 이상 해고됐다. 포드는 올해에만 추가로 공장근로자 8000명을 해고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포드 북미 생산이 계속 줄고 있어, 기존 생산인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작년 포드가 속한 UAW는 사측의 구조조정 계획에 적극 협력하기로 합의했지만, 회사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다.

루지 공장에 남은 유일한 생산시설에선 'F-150' 생산이 한창이었다. 전성기 생산량의 10분의 1도 안되는 연간 20만대 규모지만, 노조원들은 이 생산량만이라도 꼭 지키겠다는 각오였다. 생산라인을 소개한 UAW 노조원 다니엘 클레브(Daniel Klebe)씨는 "최근 도요타가 픽업트럭시장까지 치고 들어오는데다, 최근 포드 전체 판매량이 계속 줄고 있어 공장가동이 언제 또 중단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근로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고 했다. 포드는 2000년에 미국시장에서 400만대를 팔았지만, 작년에는 250만대를 파는데 그쳤다.

현재 이 공장의 시간당 생산량은 60여대로 업계 최고수준이다. 하루 2교대이지만, 종업원은 3교대로 주말반을 따로 돌린다. 따라서 토·일에도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간다. 국내 자동차 공장은 토·일요일은 쉬는게 일반적. 수많은 공장이 폐쇄된 가운데 살아남은 F-150 공장의 설비 가동률은 한국보다 오히려 뛰어난 셈이다.

루지 공장 옆엔 1929년 설립된 헨리 포드 박물관이 있다. 포드 자동차가 지난 세기 미국인의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1985년 초대 토러스 모습.

전시품 중에 단연 눈길을 끈 것은 1985년 등장한 포드의 중형세단 '토러스'였다. 출시 당시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를 제치고 미국 승용차 판매 1위까지 올랐지만, 이후 경쟁에 밀려 퇴출된 모델이다. 1990년대 이후 포드는 수익성 높은 SUV(지프형차)에 집중하느라, 캠리·어코드와의 힘겨운 경쟁을 먼저 포기해 버렸고, 그 결과 미국의 자랑이었던 토러스는 박물관 한 쪽에 역사로만 전시돼 있을 뿐이다.

토러스의 성공과 실패는 포드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에 대한 결과를 극명히 보여준다. 포드는 작년 도요타에조차 밀려 56년만에 처음 내수 3위로 떨어졌다. 작년엔 구조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27억달러 적자, 2006년엔 무려 126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루지 공장은 2010년부터 차세대 소형차 '버브'를 생산할 계획이다. 현재의 픽업트럭 판매가 줄어들 경우, 이곳 근로자들은 픽업트럭 대신 소형차를 생산하게 될지도 모른다. 클레브씨는 "픽업트럭이든 소형차든, 공장만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장을 계속 돌리기 위해서라면 노조는 어떤 차를 생산하든 적극 협조할 것이며,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는 얘기였다. 루지 공장은 디트로이트의 암운(暗雲)을 뚫고 생존할 수 있을까? 루지 공장의 안타까운 사례가 국내에서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