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하나는 여자가 남자보다 말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여자들이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쓸모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여성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과장한 책들이 곧잘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3년 4월 미국 정신의학자인 존 그레이가 펴낸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수백만 부가 팔렸으며, 2000년 6월 미국 저술가인 앨런 피스가 펴낸 '왜 남자는 듣지 않으며 여자는 지도를 읽을 수 없을까'는 1200만 부 넘게 판매되었다. 이 책에서 피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사람은 이탈리아 여자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하루에 6000~8000단어까지 재잘거린다. 또한 의사소통을 위해 추가로 2000~3000개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8000~1만 개의 몸짓과 표정을 사용한다. 이탈리아 여자들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 하루에 평균 2만여 개의 신호를 이용하는 셈이다. 서양 여자들은 이탈리아 여자들보다 20% 가량 적게 신호를 사용하여 의사소통한다. 피스는 턱에 문제가 발생하는 확률이 여자가 남자보다 네 배 높은 이유도 여자들이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자가 수다쟁이라는 신화는 요지부동이었으나 2006년부터 학계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같은 해 8월 캘리포니아대의 정신의학자인 루앤 브리젠딘이 펴낸 '여성의 뇌'(The Female Brain)에서 여자는 하루에 2만 단어, 남자는 고작해야 7000단어를 사용한다고 주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브리젠딘의 통계 자료는 다른 학자들을 자극할 만했다.
애리조나대의 심리학자인 매티어스 멜은 곧장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언어가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대학생들을 상대로 매일 사용하는 언어를 녹음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대학생에게 특수 전자장치를 2~10일간 착용시킨 뒤 하루에 12.5분마다 30초 동안 소리를 녹음해둔 자료였다. 멜은 자료를 뒤적여 남학생 186명, 여학생 210명의 소리를 분석한 결과 하루 평균 남자는 1만5669개의 단어를 사용한 반면 여자는 1만6215개의 단어를 구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멜은 여자가 남자보다 별로 수다스럽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2007년 '사이언스' 7월 5일자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멜은 말의 많고 적음이 남녀의 차이보다는 개인의 차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말수가 적은 남자는 하루에 700 단어밖에 쓰지 않았지만 가장 말 많은 남자는 무려 4만7000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하루에 깨어있는 동안 1분마다 50개 단어를 재잘거린 셈이다. 멜의 연구는 몇 가지 고정관념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여자들은 전화기 앞에서 수다를 떠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자들은 상스러운 말을 여자보다 5~6배 더 주고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여자들은 유행과 소문, 남자들은 돈과 스포츠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자가 남자보다 수다스럽지 않다는 멜의 주장은 많은 지지를 받았다. 캘리포니아대의 캠벨 리퍼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보다 말이 많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2007년 '인성과 사회심리학 평론'(PSPR) 11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성인들의 수다스러움을 측정한 60여 개의 기존 연구를 분석한 결과 비록 아주 작은 차이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말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리퍼에 따르면 상황에 따라 남녀의 수다스러움이 다르게 나타났다. 남녀 모두 같은 성끼리의 모임에서는 똑같이 말이 많지만, 남녀가 섞인 자리에서는 남자들이 대화를 주도하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여자가 말이 많다는 편견은 동서고금을 통해 뿌리 깊은 성차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는 여자들이 수다를 떨며 겸연쩍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