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의 과학혁명은 '과학의 분화'를 낳았고 18세기의 산업혁명은 '기술의 분화'를 가져왔다. 수 세기에 걸친 지식의 가지치기를 낡은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기술들이 서로 합치고 묶이는 '기술융합'은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문제는 그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의 남용과 개념의 혼란에 있다. 세상에 컨버전스(convergence)니 하이브리드(hybrid), 퓨전(fusion) 등 기술 용어들이 넘쳐나면서 과연 이들 모두가 융합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나타낼 수 있는 동의어인지를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원(語源)을 찾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컨버전스란 용어를 보자. 이 용어는 원래 '수렴'을 뜻하는 말로, 18세기 초의 과학자 더햄(Derham)이 '빛의 수렴' 현상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물학에서는 계통도 다르고 생태계도 다른 생물들이 서로 유사한 특성을 보이면서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켜 수렴진화(convergent evolution)라고 불렀다.
#'융합' 뜻으로 컨버전스·하이브리드·퓨전 등 혼용
기술경제학자 로젠버그(Rosenberg)는 동일한 기술 문제를 안고 있는 여러 산업들이 결국은 비슷한 방식과 과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현상을 보고 기술혁신의 수렴(technological convergence)이라고 표현하였다.
수렴에서 출발한 컨버전스가 '융합'이라는 의미로 바뀐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디지털(digital) 컨버전스'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과거 서로 '다른' 아날로그 형태로 나뉘어져 묶기가 어려웠던 음성(voice), 이미지(image), 비디오(video) 등이 모두 '같은' 디지털의 형태로 '수렴'되면서 손쉽게 '결합(combination)'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를 하버드 대학의 요피(Yoffie)나 월드뱅크의 본드(Bond) 등이 디지털 컨버전스라고 명명하였다.
하이브리드는 생물의 분류학(taxonomy)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18세기까지 생물학자들은 생물체를 분류하는 기본 단위로 '종(種)'을 사용하였으며 종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리적 거리가 좁혀지고 시간적 단절이 메워지면서 종과 종의 중간에 해당되는, 따라서 어느 종에도 속하지 않는 생물들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을 표현하는 용어로 나온 것이 바로 하이브리드이다. 이 말은 나아가 이종 간 교배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 즉, 잡종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유전학적으로 잡종은 생산성이 좋거나 내병성이 강한 이른바 잡종 강세의 특성을 지닌다.
오늘날의 제품 개념에서 보면,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저속주행 동안은 전기모터를 사용하다가 고속으로 달릴 때는 휘발유 엔진을 이용하는 잡종이며, 하이브리드 컴퓨터는 한편으로는 디지털 컴퓨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날로그 신호도 받아들이는 잡종이다.
퓨전이라는 용어의 발상지는 60년대의 일본이다. 기존의 수동식 공작기계가 전자기기와 소프트웨어에 의해 자동으로 제어되는 NC기계로 바뀌면서 기계(mechanics)와 전자(electronics) 기술이 뒤섞인 '메카트로닉스(mecha-tronics)' 제품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가공은 기계적으로, 제어는 전자적으로, 계측은 수리적으로 하는 복합기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 현상을 1990년대 중반 고다마(Kodama)와 같은 학자들이 퓨전(fusion)으로 명명하면서 일본의 기술혁신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융합은 시장·기술·소비자와 '충돌'하는 부작용 있어
컨버전스의 요체는 '창의성'이다. 가능하고 필요한 개별 기술들을 묶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밝은 눈이 중요하다. 하이브리드의 초점은 '유연성'이다. 개별 기술의 장점을 선택적으로 판별하고 신축적으로 활용하는 날카로운 눈이 필요하다. 퓨전의 핵심은 '종합성'이다. 개별 기술의 기능적 특성을 잘 살려 전체적인 시스템기술로 연결시키는 큰 눈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컨버전스든 하이브리드든 퓨전이든 융합은 늘 '충돌'의 잠재적 부작용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다음 세 가지의 충돌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다.
첫째는 시장의 충돌이다. 기술 융합은 크게는 산업과 산업 간에서 시작하여 제품과 제품 간, 서비스와 서비스 간까지 폭넓은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다. 기술의 융합은 시장의 중복을 가져오고 시장의 경계가 무너지면 영역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둘째는 기술의 충돌이다. 기술은 본질적 속성이 서로 다르다. 예컨대 IT는 비트(bit)의 세계를 다루고 BT는 유전자(gene)의 세계를 다루고 NT는 원자(atom)의 세계를 다룬다. 기술 간의 요철(凹凸)을 맞추는 과정에서 본래의 기술적 장점이 훼손되거나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소비자의 충돌이다. 기술 융합이 진행될수록 하나의 기기에 다양한 콘텐츠와 기능을 모두 넣기를 원하는 앞서가는 사람들(early adopter and early majority)과 기기마다 필요한 기능만을 넣어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천천히 가는 사람들(late majority and slow adopter)로 갈라질 수 있다.
하나의 길을 여러 길로 나누는 것보다 여러 길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더 많은 길을 만들기에는 유리하다. 그러나 많은 길을 많이 이을수록 복잡한 미로가 생겨나면서 길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기술 융합의 미로에서 갈 수 있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을 찾는 안목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박용태 교수의 테크노경영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