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출자기관인 한국투자공사(KIC)가 외화자산을 운용하면서 국내 자산운용사의 참여를 사실상 원천 봉쇄, 역차별 논란을 낳고 있다. KIC는 정부가 외환보유고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세운 외화자산운용기관으로, 한국은행에서 170억달러, 재정경제부에서 30억달러를 넘겨받아 국제 채권·주식시장에서 굴리고 있다. 8일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KIC는 작년 하반기 이후 투자를 집행한 90억달러의 외화 운용을 모두 골드만삭스·바클레이즈 같은 외국계 투자기관에 맡긴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A자산운용사 사장은 "우리도 아시아 지역 투자경험 등을 토대로 외화자산 운용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KIC가 '이상한 규정'을 내세워 국내사의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실력부터 쌓아라" vs "실력 쌓을 기회를 달라"

A사 사장이 말한 '이상한 규정'이란 KIC가 입찰 참여 자격을 글로벌 인덱스(global index) 투자 경험이 있는 회사로 제한한 것을 말한다.

글로벌 인덱스 투자란 '북미 47%, 유럽선진국 31%, 일본 10%'(MSCI AC월드 인덱스 기준) 등 지역별로 투자비율을 정해 놓고 전 세계 주식·채권에 골고루 투자하는 방식이다. KIC는 외환보유고 투자를 위탁한 한국은행의 요구에 따라 이 같은 제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토종 자산운용사들은 중국·동남아 등 아시아 지역 투자경험만 갖고 있을 뿐 글로벌 인덱스 투자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격미달'로 입찰 참여가 불가능했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덩치(자본금)가 작고 글로벌 자산운용 역사가 일천해 선진국 국채·주식 투자 경험을 쌓지 못했다.

한국은행은 "실력부터 쌓은 뒤 욕심을 내라"며 자산운용사측 요구를 일축하는 반면, 자산운용사들은 "기회를 줘야 실력을 쌓을 것 아니냐"고 반박하고 있다.

B자산운용사 대표는 "KIC 설립취지를 보면 '한국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이바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면서 "싱가포르투자청(GIC)의 경우 자국의 자산운용사에 돈을 우선 배분해서 자국 운용사들이 성장하도록 도와주는데 우리는 정반대"라고 주장했다.

KIC 측은 "'글로벌 인덱스 투자 지침'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돈을 맡긴 한은의 지시사항"이라며 "요즘 시장 수익률이 아시아시장 쪽이 좋기 때문에 국내 자산운용사에도 기회를 주고 싶지만 한은 지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한은은 글로벌 인덱스 투자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애초 KIC를 설립할 때, '외환보유액 기능'을 유지하도록 원칙을 정했는데,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아시아 지역 통화는 외환보유액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 주식에 투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KIC를 설립할 당시, 정부가 '제도설계'를 잘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KIC가 한은의 외환보유액 일부를 위탁받아 운용하는 형태가 아니고 채권을 발행해 외화를 사와서 독자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을 택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 외환보유액 2000억달러를 운용할 투자기관(국가외환투자공사)을 설립한 중국의 경우, 한국 방식이 아니라 공사가 특별 국채를 발행해 중앙은행에서 외화자산을 사오는 방식을 택했다.

한은 관계자는 "중국 당국자들이 KIC 운영 방식을 연구한 뒤,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반면교사(反面敎師) 케이스로 삼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활동 제약 많아 절름발이 신세인 KIC

안 그래도 KIC는 자산운용에 대한 제약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외환보유액의 안정적 관리를 중시하는 정부와 한국은행의 투자대상 제약 탓에 낮은 수익률의 채권투자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KIC의 전체 투자액 중 주식투자 비중은 7.4%(4월 말 현재 기준)에 불과하다. 세계적인 국부(國富) 투자기관인 싱가포르 GIC(주식투자비중 62%), 노르웨이 중앙은행(57%)에 비해 훨씬 낮다.

중국의 국부 투자기관이 사모펀드 투자까지 나서는 등 공격적 행보를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KIC도 사모펀드·부동산·상품 등으로 투자대상을 확대해 줄 것을 정부와 한은에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측은 '외환보유액 기능' 유지를 앞세워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의 안정성에, KIC는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일 방한했던 '크레디트스위스 자산운용'의 로버트 파커 부회장은 "한은은 사회안전망 용도의 외환보유액을 안정성 중심으로 운용하고, KIC는 투자용도의 외환보유액을 고수익 상품에 투자하면 된다"면서 "싱가포르 중앙은행과 GIC 간 역할분담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고 조언했다.

한국투자공사(KIC)

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미국 국채 등 안전자산에만 투자해 수익률이 너무 낮다는 지적에 따라 2005년7월 출범한 외화자산 투자 전담기관. 주식·부동산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고수익을 내고 있는 싱가포르 투자청(GIC)을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이강원 초대 사장이 외환은행 불법 매각 의혹에 연루돼 구속된 데다, 정부의 각종 규제로 출범 후 1년 동안 전혀 활동을 못하다 작년 하반기부터 투자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