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M&A(인수합병)의 공포에 시달리는 한국 재계에서 '백기사(白騎士) 커플'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경영권 위협을 받는 두 기업이 서로의 주식을 매입, 상대방의 우호세력이 되어주는 것으로, 동병상련의 기업끼리 손을 잡고 자구(自救)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KT&G와 신한지주의 약혼=신한은행은 3일 시간외 대량거래를 통해 KT&G의 자사주(自社株) 300만주를 매입했다고 밝혔다. 전체 지분의 2.03%에 해당하는 물량으로 약 2000억원어치다.
KT&G는 지난해 '기업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과 스틸파트너스의 협공에 홍역을 치른 데 이어, 이번에는 싱가포르계 사모(私募)펀드인 프랭클린 뮤추얼 어드바이저 펀드가 지분을 10.41%까지 매집한 후 "경영 문제에도 관여할 수 있다"고 공시, KT&G에 대한 경영권 공격을 시사했다. KT&G 현 경영진 측 지분은 우리사주를 포함(자사주 제외), 12.7% 내외이다.
여기서 신한은행 그룹이 백기사로 등장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으므로, KT&G가 보유하던 자사주 300만주는 지분경쟁에서 의미가 없었다. 이 지분을 신한은행이 쥐고 있다 주총에서 '표'로 만들어주면 KT&G 경영진으로선 천군만마인 셈이다.
이에 앞서 KT&G도 지난 6월 20일, 신한은행의 모회사인 신한지주 주식 350만주(0.92%)를 사들였다. 역시 약 2000억원어치다. 신한지주가 지주회사법상 KT&G 지분을 보유할 수 없기 때문에 신한은행을 중간에 끼워 넣었다.
양측은 공식적으로 '우연의 일치'라고 밝힌다. KT&G는 "금융업의 향후 전망이 좋은 데다, 대출 받기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신한지주 역시 "순수 투자차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백기사 커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재일교포 자본인 신한지주 입장에선 현재 경영권이 불안한 상태는 아니다. KT&G가 보유한 0.9%의 지분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서로의 지지 약속을 확인하는 '약혼반지'는 될 것이라고 신한지주 관계자는 말했다.
◆늘어나는 커플들='백기사 커플'은 최근 부쩍 늘었다. 신한금융그룹은 지난 3월에도 일명 '장하성 펀드'(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가 경영 참여 중인 크라운제과와 약 100억원어치의 주식을 서로 사들였다. 신한지주로서는 지분율을 계산할 만한 수준도 아니지만 크라운제과로선 약 6.44%에 해당하는 우호지분이 생겼다.
세계 1위 철강기업 미탈로부터 "M&A에 매력적이다"는 얘기를 들었던 포스코 역시 '백기사 커플맺기'에 적극적이다. 포스코는 지난 4월, 지분 1%를 현대미포조선에 약 3500억원에 팔고, 반대로 현대미포조선의 모회사인 현대중공업 지분을 1.9% 사들였다.
해운업계에서는 라이벌 기업끼리 주식을 교환했다. 작년 11월 한진해운은 대한해운 지분 7.0%를 인수하고 대한해운은 한진해운 지분 1.67%를 인수하며 커플이 됐다. 두 회사 모두 외국 경쟁사·투자자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던 상황이었다. 또 부국증권과 한국단자공업이 자사주 일부를 교환했다.
◆커플의 효과는?=보통 주가는 M&A 가능성이 높아져야 오른다. '백기사'의 등장은 오히려 주가에 악재인 셈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잠재력을 살리는 투자를 하거나, 안정된 경영권을 바탕으로 경영에 전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증권 전문가들은 말했다.
신영증권 조용준 리서치센터장은 "경영권에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 투자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지분을 교환하는 기업이 더 늘어날 것"이라며 "기업들은 같은 돈이라면 자사주를 사기보다는 서로 백기사가 되는 방법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3일 증시에서 KT&G는 1.78%, 신한지주는 2.13% 상승, 코스피지수 상승률(1.93%)과 엇비슷했다. 주식시장도 똑 부러지는 판단은 내리지 못한 셈이다.
◆'백기사(白騎士·white knight)'
적대적 M&A(기업 인수·합병)의 대상이 되어 경영권 위기를 맞은 기업에 대해 기존 경영진을 지지하겠다고 나선 제3자 우호 지분. 정의의 기사(騎士)처럼 도움의 손을 내민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백기사 커플'이란 두 기업이 서로의 주식을 교환, 서로가 백기사가 되어 주는 것으로 지분 상호 보유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