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의균 기자 egkim@chosun.com

지난 2월 초 세계 최대 사모펀드(PEF ·private equity fund)인 블랙스톤이 미국 최대 부동산업체인 EOP(Equity Office Properties)를 390억달러(약 36조원)에 사들였다. PEF의 기업 인수가격으로는 사상 최고가였다. 하지만 이 기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바로 2월 말에 KKR(Kohlberg Kravis Roberts & Co.)과 TPG(Texas Pacific Group)가 미국 최대 전력회사 TXU를 무려 450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KKR은 지난해 미국 병원체인업체 HCA (Hospital Corporation of America)를 330억 달러에 인수하기도 했다.

■ 호황맞은 PEF, 비판도 거세

PEF 시장이 호황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동원하여 국경과 산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업들을 인수하고 매각하는 PEF는 단순히 M&A(인수합병) 시장의 '큰손'을 넘어 글로벌 산업 판도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거물'이 됐다.

PEF의 기업인수가 활발해지면서 PEF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도 가열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뉴브리지캐피탈·론스타 등이 단기 차익만을 노리고 국내 기업을 무리하게 구조조정한다는 비판이 거세고, 고용불안·국부유출 등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PEF에 대한 비판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확대되고 있다. 올해 초 세계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들이 PEF 규제에 나서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PEF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업을 인수한 뒤 단기 수익을 높이기 위해 무자비하게 감원에 나선다는 것이다. 전 세계 150개국의 900여 서비스 부문 종사자 1500만명을 대표하는 노조단체인 UNI(Union Network International)의 필립 제닝스 위원장은 "PEF가 거금을 차입해 기업을 M&A하는 것이 해당 기업의 경영을 불안정하게 하고 고용도 불안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PEF가 가장 활발한 미국에서도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버락 오바마(Obama) 등 일부 의원들이 PEF 규제 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정도다.

역풍이 거세지자 PEF업계도 방어에 나섰다. 미국 상위 10대 PEF들은 협회를 구성해 PEF의 긍정적 효과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PEF의 기업 M&A가 장기적으로는 일자리를 늘리고, M&A 이후 비용 절감 노력은 PEF뿐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게 주된 방어논리다.


■ PEF, 유럽서 4년간
일자리 100만개 창출

일부 정치인과 노조의 지적대로 PEF는 과연 이익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무자비한 공룡인가, 아니면 쓰러져가는 기업을 회생시키고 고용을 창출하는 고마운 존재인가? 급속 성장하는 PEF산업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제 한국에서도 호불호(好不好)와는 관계없이 PEF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지난 5년간 유럽에서만 1940억유로(약 240조원)가 출자약정(fund raising)됐고, 그 중 1650억유로(약 204조원)가 실제 투자됐다. 240조원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3배다.

흔히 PEF는 단기적으로 투자금 회수에만 급급해 일자리를 줄이고, 사업부를 팔아치워서 조직을 와해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컨설팅업체 AT커니가 최근 유럽과 미국의 PEF 동향을 분석한 결과, PEF가 인수한 회사의 조직이 다운사이징(축소)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PEF는 지난 4년간 유럽에서 100만개, 미국에서 60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창출했다. PEF가 투자한 회사들의 고용인원은 600만여 명으로, 유럽의 600대 상장기업 임직원 수의 25%에 해당하는 규모다.

PEF가 투자한 회사들은 일반 기업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용을 늘렸다. 퍼미라(Permira)·EQT·매디슨디어본(Madison Dearborn) 등으로 구성된 PEF 컨소시엄이 1997년 독일 지멘스(Siemens)의 치과(齒科) 의료장비 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시로나(Sirona)는 종업원 수가 1900여명으로 설립 당시의 2배를 넘었다. 1999년부터 PEF인 BC파트너의 투자를 받아온 오스트리아의 고성능 경주용 모터사이클 생산업체 KTM은 직원 수가 1991년에 비해 10배로 늘었다. 독일계 금융·유통 시스템 소프트웨어 전문업체인 윈코닉스돌프(Wincor Nixdorf)는 1999년 KKR이 인수한 후 4000명을 더 뽑았다.

영국의 경우 2000~2004년 사이에 PEF가 투자한 회사의 고용은 14% 늘어난 반면, 국영이나 민간 부문의 고용증가는 0.3%에 그쳤다. PEF가 투자한 회사의 연평균 일자리 수 증가율은 국가별로 2.3%(미국)부터 18%(스페인)까지 다양했다.

특히 AT커니 조사에 참여한 기업의 85%는 고용창출의 원인이 M&A가 아니라 기업내부의 자체적 성장(organic growth) 덕분이었다고 응답했다.

물론 PEF가 기업을 인수한 후 고용을 감축하는 일부 사례도 발견됐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이익극대화를 위한 구조조정의 대명사'라는 PEF의 이미지는 실제보다 확대해석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 투자확대->매출·수익성 증가->고용증가의 선순환

PEF가 일반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비결은 뭘까? AT커니 분석에 따르면, PEF의 막강한 자금력이 핵심 단서다. 자금난에 시달려 투자에 소홀했던 회사들이 PEF로부터 안정적인 투자예산을 확보한 후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수익 산업에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다. 투자확대는 매출과 수익성의 증가로 이어지고, 결국 고용을 창출하는 선순환으로 연결됐다.

유럽지역 설문결과, PEF 투자를 유치한 기업의 72%가 소유권이 바뀐 이후 투자가 늘었다고 응답했다. 투자위축으로 기술력이 떨어지고, 그 결과 수익성 악화와 매출 급감으로 대규모 감원을 할 수밖에 없던 빈곤의 고리를 PEF의 자금수혈로 끊어낸 것이다. 영국에서는 PEF투자회사의 투자증가율이 14%로 민간부문 평균(3%)을 크게 웃돌았다. 네덜란드에서는 PEF투자 이후 매출 대비 자본적 지출(CAPEX) 비율이 4.6%에서 5.8%로 증가했고, 독일에서도 PEF 투자 이후 교육·R&D·마케팅 등 이른바 '소프트' 투자가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PEF 투자를 받은 회사의 매출증가율은 일반 기업에 비해 매년 14~26%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격적인 투자로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늘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유럽지역의 PEF투자유치회사 90%는 일반기업보다 더 높은 매출증가가 있다고 응답했다. 스페인의 경우 PEF투자유치회사의 매출증가율이 26%로 일반기업 평균(3%)과 큰 차이를 보였다. 영국에서도 PEF투자를 받은 회사의 매출증가율이 20%로 FTSE100 기업 평균(8%)를 압도했다.

PEF 투자로 매출과 수익성이 개선되는 현상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오너가 확실한 한국과 달리, 전문경영체제가 정착된 선진국에서는 기존 경영진이 PEF 자금을 끌어들여 자기 회사를 인수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를 인수한 경영진은 군살을 빼고 회사를 재정비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경영에 나선다. AT커니 조사결과, 유럽과 미국의 MBO(management buy out·임직원이 힘을 합쳐 자기 회사를 인수)나 MBI(management buy in·임직원이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자기 회사를 인수) 기업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4%에서 7%로 증가했다.

PEF는 IMF처럼 긴급 구호자금이 될 수 있지만, 경영체제를 뒤흔드는 정복자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PEF가 투자한 돈을 안정적으로 회수하려는 목적으로 경영체질개선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PEF가 단기적인 '히트앤드런'(hit and run)으로 시장질서를 교란하고 고용을 악화시킨다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글로벌 산업계에 메가파워로 부상하는 PEF가 자금조달과 투자의 한 방법이란 인식을 갖고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공동기획 : ATKEA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