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설계 회사인 '램버스'는 요즘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악동(惡童)'으로 통한다. 이 회사는 1990년대 말 '램버스 D램'이라는 독특한 반도체 기술을 개발, 한때 세계 반도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램버스 D램 시장이 기대만큼 커지지 않자, 이 회사는 2000년대 들어 주요 반도체 업체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제기하는 소송 전문 기업으로 변신했다.
한국 하이닉스도 지난 4월 미국에서 열린 1심에서 램버스에 약 3000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평결을 받았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지금은 대부분의 업체가 램버스 D램 생산을 중단한 상태"라면서 "하지만 램버스는 특허 침해를 주장하며 말도 안 되는 특허료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 '특허 알박기'에 고전 중=세계 IT(정보기술)업계가 '특허 알박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허를 선점(先占)한 뒤 주요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어마어마한 합의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
'특허 알박기'의 전문가 또는 전문기업들이 바로 특허침해 소송을 일삼는 '특허 괴물'(페이턴트 트롤·patent troll)들. 특허 괴물들은 보통 생산 라인이나 영업 조직은 두지 않는다. 변호사 몇 명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송 제기를 목적으로 부도 기업의 특허를 경매 등을 통해 사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허 괴물의 대표적 희생양으론 '블랙베리'(무선 이메일) 서비스업체인 리서치인모션(RIM)이 꼽힌다. 캐나다 회사인 RIM은 지난 3월 미국 대법원 판결에 따라 무선 통신 특허를 보유한 NPT라는 회사에 6억1250만달러(약 6000억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지불했다. NPT는 직원도 없고 서류로만 존재하는 회사. 하지만 미국 법원은 'RIM의 미국 내 서비스를 중단해 달라'는 NPT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RIM은 결국 NPT와 합의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국내에서도 등장 시작=개인 발명가 A씨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천지인' 방식 휴대전화 자판에 대한 특허 소송을 제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굳이 A씨를 '특허 괴물'이라 몰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지적이지만, 대기업과의 특허 전면전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A씨는 삼성전자 근무 경험이 없지만, 지난 1990년대 말 삼성전자와 비슷한 시기에 특허를 신청했었다. A씨는 삼성전자에 승소할 경우, 최고 900억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씨는 또 천지인 특허 분쟁 외에도 한글 도메인 업체인 넷피아와 특허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한글 도메인이란 인터넷 주소창에서 영어가 아닌 한글만 쳐도 해당 사이트로 연결되는 서비스. 법원이 '넷피아의 특허를 무효화해 달라'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한글 도메인 서비스가 중단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서는 특허권 남용 제한 입법안=미국에선 특허 괴물에 의한 피해가 늘면서 특허권 남용을 제한하자는 입법도 추진되고 있다. 특허 제도의 취지는 발명자에게 독점적 권리를 보장해 기술 혁신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지만, 최근 들어선 독점적 권리를 악용해 기술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
실제 인텔·마이크론·내셔널세미컨 등 미국 반도체 업계는 특허 괴물을 규제해 달라는 입법 청원에 나선 상태고, 시스코·휴렛팩커드 등 주요 IT 기업도 지난달 특허 괴물에 맞서기 위해 '특허 공정성 연합'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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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를 뜻하는 페이턴트(patent)와 괴물을 뜻하는 트롤(troll)을 합친 말. 특허를 미리 확보한 뒤 시장이 커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해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전문 소송꾼을 지칭한다. 최근 들어 미국에선 특허 괴물을 위한 특허 경매가 자주 열리며, 특허 중개를 전문으로 하는 컨설팅 회사도 등장하는 추세다.
▲ 특허로 신기술을 선점한 뒤 소송을 통해 거액을 요구하는 소위 '페이턴트 트롤'을 다룬 본지 6월 7일자 B1면 기사와 관련하여 개인발명가 A씨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여 왔습니다. '삼성전자와 진행 중인 소송은 A씨가 신기술을 선점해 거액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삼성측이 A씨가 발명한 특허를 사용하자고 먼저 제안했던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넷피아닷컴과의 분쟁은 특허 무효소송이 아닌 양자 간의 공유계약에 대한 소송으로서 법원이 A씨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A씨에 의한 인터넷 한글 주소 서비스 제공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