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정문술 빌딩 바이오시스템학과 전산실. 방학인데도 학생들이 삼삼오오 남아 있다. 이곳에서 만난 4학년 이선재(22)씨는 "과제가 미친듯이 많다"며 손을 내저었다. "기숙사에는 새벽 2~3시에나 들어가요."

검찰 수사까지 들어간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논란으로 과학계가 떠들썩하지만, KAIST 바이오시스템학과 학생들은 차분하다. 학과 교수와 학생들의 화제는 '황우석'도 '방학'도 아닌 '과제'. 교수들은 공동 워크숍 과제 준비 때문에 '초치기'에 들어가 있고, 학부생은 학부생대로 마감날짜가 임박한 연구 과제 때문에 초조한 표정이다.

KAIST 바이오시스템 학부는 이제 막 시작된 MT(Medical Technology) 분야를 한국에서 이끌어가고 있다. MT는 IT·BT·NT 기술을 총동원해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종합학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DNA칩, 나노 진단 로봇, 신약인프라 개발부터 사이보그 연구까지 '바이오 IT'를 아우르는 학문이다.

대전시 유성구 KAIST 바이오시스템학과 나노팹연구실에서 학생들이 나노기술을 활용해 만든 반도체 소자를 검증하고 있다. 대전=전재홍기자 jhjun@chosun.com

세계적으로는 제너럴 일렉트릭(GE)·머크 등 다국적 의료기기·의약 기업들이 이 부문에 연구투자를 벌이고 있다. 향후 시장 규모가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다. 때문에 이광형(53) 학과장은 바이오시스템학과를 "학과라기보다는 벤처"라고 부른다.

학과 설립에는 대표적인 벤처기업 미래산업의 정문술 회장이 300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치 벤처기업 같은 연구 분위기다. 사실 바이오시스템학과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전자·물리·화학·생명 등 각 학부에서 처음 학생들을 모았을 때는 주변에서 "취직할 데나 있겠느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들은 열정으로 그 같은 우려를 극복해가고 있다. 대학원생 하기룡(23·석사과정)씨는 "손쉽게 대기업에 취직하기나 바라는 학생들이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구성원들의 독특한 개성과 열정이 학과의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4년 만에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모두 150명까지 늘었다. 외국인도 12%에 달한다. 서울대 등 15개 대학이 KAIST를 따라 유사한 학과를 창설했다. 2003년에는 IBM에서 60억원대의 수퍼컴퓨터를 유치했다. 교수 4명의 제안 끝에 IBM은 신생학과에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조건으로 수퍼컴퓨터를 제공했다. 연구비도 매년 1억원씩 지원하고 있다.

MT의 최대 장점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연구 성과가 가능하다는 것. 실제로 학부생들의 연구를 전시하는 '포스터데이'를 들여다보면 학과의 특성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쥐에게 종소리를 들려주고 전기자극을 가하며 공포에 대한 면역을 기르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원인이 불분명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연구하는 학생도 있다.

도서실에서 만난 4학년 조영춘(21)씨는 "생명체의 작용을 기계에 적용해보고 있다"며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충격을 흡수하는 과정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언뜻 보면 황당한 연구들이지만, 이 같은 노력은 실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연구팀들이 잉크젯 프린터의 잉크 분사 과정에서 나노기술을 도입한 칩을 개발한 게 대표적. 바이오칩 분야에서도 올해부터 본격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할 전망이다.

이 교수는 "과학이란 혁명이 아니라 꾸준히 진화하는 것"이라며 "우리 MT 전공 학생들이 제2의 GE, 제2의 머크를 십여 년 뒤 한국에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