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주가지수가 처음 1000을 돌파한 1989년 3월은 저금리·저유가·저달러로 상징되는 '3저(低)호황'의 막판이었다. 94년9월은 엔화강세에 힘입은 반도체 경기호전, 1999~2000년은 IMF쇼크의 반작용과 세계적인 'IT경기'가 맞물렸다. 지금까지 1000돌파 때 경제 성장률은 대부분 9% 이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증시에서는 오히려 '불황'이 증시를 부양하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투자의욕을 잃은 기업들이 증시에서 돈을 끌어대 쓰는 대신, 자기 회사 주식을 사들이며 주가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상장사들이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한 유상증자 금액은 1조2200억원인 반면 자사주를 사들인 액수는 3조5289억원이다. 증시에서 돈을 조달해 사업에 투자하기는커녕, 2조400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입해 주식을 사들이며 '재테크'를 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 1995년 이후 8차례에 걸쳐 4조1044억원을 들여 자사주 1572만주를 샀고, 올해도 9월 13일까지 모두 1조9000억원 어치의 자사주를 추가로 매입 중이다. 포스코 역시 도쿄증시 상장을 위해 350만주의 자사주 매입계획을 발표했다.

KTB자산운용 장인환 사장은 "주식 공급(유상증자·상장)은 적은데 주식을 사들이는 수요(자사주 매입·적립식 펀드)가 많아지면서 불황에도 주가가 올라가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기업들 투자가 줄어들어 저금리가 장기화되는 것도 주가상승의 원인이다. KB자산운용의 이원기 대표는 "예·적금만으로 재산을 불릴 수 없어지자, 적립식 펀드 등으로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주가가 상승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 위축'이 증시를 떠받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상황이다. 미래에셋증권 이정호 리서치센터장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증시가 올 들어 사상 최고치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IT(정보기술) 이후 새로운 산업이 부상하지 않아 신규투자가 부진하며, 남아도는 돈이 증시로 들어와 전 세계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별 국가 경제상황이 주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씨티그룹을 비롯,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한국의 성장률 예측치를 속속 하향조정하고 있지만, 막상 외국인들은 7월 이후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3000억원 어치 주식을 순매수(매수액-매도액)했다.

이런 '불황이 만드는 고주가'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도 높다. 경제 펀더멘틀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가 상승세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설비투자 대신 자사주 매입이란 재테크에 전념해 성장 잠재력을 갉아 먹는다는 지적도 있다.

대우증권 홍성국 투자분석부장은 "투자처가 없어지는 현상은 장기적으로 보면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며 "세계적으로 새로운 투자를 이끌 산업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 세계 주식시장 상승세도 결국은 끝나게 될 우려가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