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국경을 초월한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신(新)기술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 국방부가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해 한국업체들과 전략적 제휴를 추진 중인 것처럼 국가 차원에서도 첨단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신기술 전쟁에는 영원한 적(敵)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냉엄한 논리가 적용된다. 전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표준 전쟁(Standard War) ▲모바일 전쟁(Mobile War) ▲클린 전쟁(Clean War) 등을 3회에 걸쳐 시리즈로 보도한다.
첨단기술의 표준을 선점(先占)하기 위해 산업계에서 피말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사의 기술이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으면 단숨에 시장지배력을 키울 수 있지만, 표준화 경쟁에서 탈락하면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년 초 삼성그룹의 이학수·윤종용 부회장과 이상완 사장은 서울 한남동의 이건희 회장 자택을 급히 찾았다. 세계 전자업계의 거인인 소니가 LCD(액정화면) 합작회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TV·모니터·휴대전화기 등에 쓰이는 얇은 LCD는 뚱뚱한 브라운관 제품을 급속히 대체하고 있는 첨단 전자부품이다.
삼성의 실무진에서는 "우리가 LCD분야 선두업체인데 굳이 소니와 제휴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만하지 마라. 삼성은 아직도 소니에게 배울 게 많다"며, 즉시 제휴를 받아들이도록 지시했다.
두 회사는 결국 S-LCD라는 합작사 설립에 전격 합의했다. 합작사에 2조원 이상을 공동투자하는 것은 물론, 서로의 특허기술을 전면 공유한다는 결단도 내렸다. 차세대 LCD 기술의 표준을 장악한다는 공동 목표도 세워졌다. S-LCD는 이달 중순 세계 최초로 40인치 이상 대형 LCD를 양산할 예정이다.
2000년 이후 전자산업계의 주도권을 상실해가던 소니는 삼성과의 제휴를 계기로 다시 기술표준 경쟁을 리드할 힘을 얻었다. 하지만 마쓰시타·도시바 등 일본 업체들은 "기술대국인 일본의 자존심을 팔아먹었다"며, 소니를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표준전쟁은 애국심보다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가르기'가 이뤄진다. 지난해 7월 북미지역 디지털TV의 표준규격을 제정하기 위해 미국에서 열린 국제회의가 좋은 사례다. 아날로그 TV보다 훨씬 선명한 화면과 생생한 음향효과를 내는 디지털TV의 기술표준을 잡으면 전 세계 TV제조업체로부터 막대한 기술료(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
180여 업체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LG전자, 필립스, 브로드컴 등 10여개 회사의 디지털 기술이 유력한 표준후보로 올라왔다. 당시 일본 업체들은 LG전자가 제출한 표준안에 대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쳤다. 삼성전자도 이에 동참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같은 나라 기업이라고 무조건 찬성표를 던질 수는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LG전자의 기술이 표준규격으로 채택됐으나, LG와 삼성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파였다.
차세대 DVD 분야의 표준 전쟁은 더욱 극적이다. 미국·유럽 등 대륙별로 다른 DVD 저장방식은 곧 하나의 단일기술로 통합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가전업체들은 일제히 새로운 표준규격에 맞는 DVD플레이어를 생산해야 하고, 가정용 비디오 시장도 전면 재편된다.
전 세계 전자업체와 영화사들은 '블루레이'와 'HD DVD'라는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표준전쟁을 치르고 있다.
청색 레이저를 사용하는 블루레이 방식은 기존 DVD보다 저장용량이 5배 이상 커 HD TV(고화질TV) 수준의 화질과 음향 성능을 자랑한다. 80년대 비디오 표준전쟁(베타방식 대 VHS)을 치렀던 소니와 마쓰시타는 이번에는 '블루레이'라는 한 배를 탔다. 라이벌 관계인 삼성과 LG도 블루레이 진영에 나란히 합류했다.
반면 'HD DVD' 기술은 블루레이보다 화질은 약간 떨어지지만 기존 영상설비를 사용할 수 있어 투자비용이 적고 개발기간도 짧은 것이 특징이다. 도시바·NEC가 주도하는 'HD DVD' 진영에는 파라마운트·유니버셜픽처스·워너브라더스 등 미국 영화사가 참여했다. 한때 일본 기업에 인수될 것을 우려하던 미국 영화사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측과 손을 잡았다. 적과 동지의 개념이 그때 그때 달라지는 것이다.
각국 정부도 자국에 유리한 표준을 확보하는 일에 필사적이다. 진대제(陳大濟) 정보통신부 장관은 "한국의 앞선 IT기술을 세계 표준으로 만드는 것이 최대의 역점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 무역대표부(USTR)는 최근 "한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개발된 IT기술 표준을 업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이 미국의 기술표준을 채택하도록 지원사격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범정부 차원에서 산·학·관 공동기구를 구성, 자국의 IT기술을 세계무대에서 표준화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