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 도매업체인 ㈜동방에너지의 임성주(61) 사장은 경기 침체보다 은행의 빚 독촉이 더 무섭다.

올 중반 만기가 돌아온 22억여원의 대출금에 대해 거래 은행이 "신용등급이 떨어졌다"며 전액 회수를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5억원짜리 신용대출과 3억원짜리 부동산담보대출은 작년의 두 배에 가까운 연 13.11~16.66%의 금리를 지급하고 가까스로 6개월 만기를 연장했지만 2000년 신용보증기금의 지급 보증을 받아 대출한 14억원은 만기 연장을 거부당했다.

임 사장은 "25년 사업을 해 오면서 이렇게 은행에 시달리기는 처음"이라며 "며칠 전 저녁 지점에 불려가 2시간 동안 심문당하듯 빚 독촉을 받았을 때에는 그냥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은행들이 중소기업에 대해 집중적으로 대출 회수에 들어가면서 중소기업의 자금원이 말라붙고 있다. 대부분 중소기업인들은 지금의 자금난이 'IMF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신규 대출은커녕 대출 회수 독촉에 하루하루 피를 말리고 있는 상황이다. 빚 독촉에 몰린 나머지 사채시장에서 고리 자금을 빌렸다가 기업을 날리는 업체들도 나오고 있다.
은행이 대출 회수에 돌입한 이유는 올해 초부터 달라진 대출 시스템 때문이다. 새로운 대출 시스템은 기업의 매출액이 줄어들거나 순이익이 감소하는 조짐이 보이면 가차없이 대출을 회수해 버린다.

이 때문에 지독한 내수 부진에, 고유가에 따른 원자재 가격 폭등에 신음하는 중소기업이 은행의 빚 독촉에까지 쫓기는 삼중고(三重苦)에 신음하고 있다.

TV·모니터 등에 들어가는 마그네트와이어(영상압축장치)를 생산하는 화일전자의 윤장혁(43) 사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최근 은행으로부터 대출 한도가 20%나 줄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원자재인 동(銅) 값이 두 배나 폭등, 10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가 날 것 같아 6월 결산을 할 즈음 주거래 지점과 미리 상의했더니 '사정은 알지만 요즘 본점에서 컴퓨터에 입력한 재무제표로 대출 한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한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미국 공인회계사 출신인 윤 사장은 "은행이 기계에다 숫자만 입력하고 그 결과로만 모든 대출을 처리한다면 심사 기능은 왜 있느냐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은행의 중소기업 신규 대출은 총 11조1447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 26조6316억원보다 무려 58.3%가 줄었다.

한기윤 중소기협중앙회 정책조사본부장은 "원자재 값이 평균 30% 이상 상승하면서 중소기업의 자금 수요는 늘어나는데 은행이 대출을 줄이는 바람에 지옥 같은 자금난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물론 시중 은행들도 할 말은 있다. 올 초부터 중소기업 연체율이 3%대로 올라서면서 적극적인 대출 관리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20억~40억원에 이르렀던 지점장들의 전결 한도(재량으로 대출할 수 있는 액수)도 1억~5억원으로 줄이고 신규 대출과 기존 대출의 연장에 관한 모든 권한을 본점으로 넘기고 있다. 본점은 회사 사정에 상관없이 기업의 재무제표를 컴퓨터에 입력, 매출이나 이익률이 감소하는 등 부실 징후를 보이면 곧바로 대출한도 축소, 여신 회수에 나선다. 시중 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은행도 이익을 내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매정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은행들의 지나친 안전지상주의로 인해서 예금자와 기업을 이어주는 금융기관의 자금 중개 기능이 크게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진수 수석연구원은 "은행이 대출심사를 재무제표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성장성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전문 심사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