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시중은행 프라이빗뱅킹(거액 고객을 위한 종합금융서비스) 팀장 S씨는
최근 단골고객으로부터 비밀 유지를 당부하는 '은밀한'부탁을 받았다.
속칭 '묻지마 채권'으로 불리는 비실명(非實名) 채권을
20억~30억원어치 사달라는 부탁이었다.
S씨는 잘 아는 증권사 직원에게 물건을 구해 달라고 했으나 "주문은
많고 물건은 달려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만 돌아 왔다. 증권사
직원은 "가격도 크게 올랐다"며 "작년 말 거래를 중개했을 당시
1만4000원선(액면가는 1만원)이던 증권금융채권 가격이 지금은 한참 더
올라 1만6000원선은 돼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연말을 앞두고 각 은행 프라이빗뱅킹 상담 창구에는 '묻지마 채권'을
구하려는 부자(富者)들의 주문이 늘어나고 있다. '묻지마 채권'이란
IMF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98년 발행된 5년 만기 비실명 채권을 말한다.
국세청의 자금출처 조사가 면제돼 상속·증여 수단으로 적격인 점이 최대
장점이다. 하지만 유통 물량은 적어 웃돈(프리미엄)까지 붙어 거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98년 비실명 채권은 고용안정채권 8735억원 증권금융채권 2조원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 1조원 등 모두 세 종류가 발행됐다. 당시
외환위기 속에서 지하자금을 끌어들여 시중 자금난을 덜겠다며
'면죄부'가 붙은 비실명 채권을 만든 것이었다.
이중 고용안정·중기구조조정채권은 일반투자자를 상대로 청약을 받아
발행돼 지금까지 매물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으나 증권금융채권은 일부
유통되고 있다. 발행 당시 8000억원어치가 투신사에 강제 배정됐는데,
가격이 오르면서 투신사들이 물량을 내놓아 이것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증금채 거래가격은 액면가 1만원짜리가 1만6000원 수준. 표면금리가
연 6.5%인 점을 감안하면 이 채권을 지금 사면 내년 6월 만기 때
1만3000원(세금 공제 후 기준) 정도를 받을 수 있으니 약 3000원의
프리미엄(웃돈)이 붙어 있는 셈이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현재 23%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어 있으나
증여세율이 30% 이상 적용되는 사람(증여금액 10억원 이상)의 경우
프리미엄을 주고도 1년 만에 7% 이상 남으니까 웃돈을 주고도 살
만하다"고 말했다. 또 이 채권을 이용해 20억원을 상속할 경우 6억원
이상의 상속세를 절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만원짜리 증금채의 거래가격은 작년 말 1만4500원 수준에서
약 1년 만에 1500원이 오르는 등 만기가 다가올수록 채권값이 올라가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채권 전문가는 "만기 때 돈을 찾으면 어떤
식으로든 국세청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에 서둘러 손을
털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어 매물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 간에 1대1 거래로 이뤄지는 비실명
채권 거래는 주의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무엇보다 진품(眞品)임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아 자칫하면 가짜 채권에
속을 수도 있다.
따라서 1대1로 거래를 하더라도 반드시 증권사 창구를 통해 간접
거래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진품 여부를 반드시 확인할 것을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