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전자랜드 1층 매장.
LG·삼성전자·소니·필립스 등 유명 전자 제품들이 즐비한 사이로
'유니크로'라는 다소 생소한 브랜드의 TV와
DVD(디지털비디오디스크)플레이어, 홈시어터(안방극장)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이들 제품은 전자제품 전문 유통 업체인 전자랜드가 자체
개발한 PB(Private Brand) 상품으로 제품 생산은 중국 최대의
종합가전기업인 TCL사가 맡고 있다.

전자랜드 매장 직원은 "삼성·LG에 비하면 브랜드 인지도가 매우
떨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제품이 팔리고 있다"면서 "품질도
상당히 좋아졌기 때문에 지금껏 물건을 팔았다가 고객의 항의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첨단 PDP(벽걸이형) TV
40인치 제품도 한국산보다 200만원 가량 싸게 출시했다고 덧붙였다.

전자랜드 매장 위층에 있는 오디오·비디오기기 수입상가는 전체 판매
제품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이다. 이곳에서 팔리는 제품은
필립스·소니·JVC 등 세계적인 브랜드를 달고 있지만, 원산지는 대부분
중국·말레이시아·태국 등이다. 오디오·비디오기기 판매상인
김기완씨는 "최근 들어 중국산 제품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면서
"특히 스피커 제품은 90%가 중국산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삼성·LG전자 같은 토종 브랜드도 '원산지 중국'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요즘 20·30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휴대용 CD플레이어나 MP3(디지털음악파일) 플레이어, 각종 오디오기기,
필름 카메라 등은 100%가 '중국산'이다. 서울 마포구
윤미숙(31·주부)씨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삼성전자 CD플레이어를
샀는데, 원산지가 중국이어서 깜짝 놀랐다"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전자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산 가전제품이 한국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선풍기·진공청소기·토스터·전기다리미·헤어드라이어 등 소형
가전제품들은 이미 한국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으며, 최근에는
TV·세탁기·에어컨·냉장고 등 우리나라의 주력 가전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전자산업진흥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현재 중국 가전제품의 수입은
6억8074만달러로 작년에 비해 20.2%나 증가했다. 중국산은 국가별
규모면에서도 일본산(8억7158만달러)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국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년 27.4%에서 올해 35.5%로 8.1%포인트나
급상승, 시장 장악력이 갈수록 강화되는 상황이다.

한국전자산업진흥원 유중현 팀장은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유럽의 유수
가전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중국에 현지공장을 설립하면서 중국이 세계
가전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중국에서
역수출되는 한국산 제품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산 가전제품의 가장 큰 장점은 물론 가격 경쟁력이다. 하이마트 등
전자유통점에서 판매되는 카세트·히터기·다리미 등 웬만한 소형
가전제품은 3만~5만원에 팔리고 있고, DVD플레이어와 스피커·앰프를
묶은 홈시어터시스템도 국내 제품의 절반 이하인 30만~50만원이면
충분하다. 전자제품 수입상인 김현중(35)씨는 "중국 제품은 워낙 원가
경쟁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품목만 잘 정하면 한국에서 싸게 팔아도
이익이 남는다"면서 "최근 중국산 가전제품을 수입하는 오퍼상들이
100곳이나 난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중국산 제품의 기술·디자인 개발로 한국산과의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는 데다 최근에는 대형 할인점이나 전자 양판점 같은 유통
업체들이 독자 브랜드를 부착하고 애프터서비스 체계를 구축하는 등
중국산 제품의 유통구조도 갈수록 체계화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하이얼·창훙·TCL 같은 중국 가전업체들이 내년쯤이며 자가 브랜드로
한국시장에 진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산 소형 가전을 수입하는
유파코리아의 김진선 과장은 "요즘엔 수입업체가 애프터서비스를
책임지기 때문에 중국산 가전에 대한 불량 시비도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우려되는 점은 중국산이 세탁기·냉장고·에어컨·컬러TV 등 대형
가전제품은 물론 DVD플레이어, 프로젝션TV·PDP(벽걸이형)TV 같은 디지털
가전시장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 실제 지난 10월 말 현재 컬러TV
수입은 3000만달러를 넘어섰고, 세탁기는 작년 60만달러에서 올해
181만달러로 3배나 급증했다. 또 에어컨(83%)·냉장고(63%) 등도 높은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휴대전화기 보따리상인 김모(35)씨는 "최근
중국에서 만드는 휴대전화기도 깜짝 놀랄 만큼 제품이 좋아졌다"면서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삼성·LG 등 한국산 휴대전화기 판매가 주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중국산 가전의 약진에 대해 전문가들은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중국 제품이 일정 부분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代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적인 가전기업의 공장을
유치하면서 조립 생산에 관한 한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 기업은 부가가치가 높은 핵심 부품 쪽으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 양평섭 연구원은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 조립시장은 중국에 넘겨주고, 우리는 핵심 부품과 첨단
소재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 세계 최대의 생산기지인 중국을 활용하는
쪽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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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가전 低價 앞세워 세계시장 휩쓸어
카메라 50%·TV 에어컨 30%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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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에서는 21인치 중국산 컬러TV가 단돈 80달러(약 9만6000원)에
팔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높은 물가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마쓰시타
브랜드의 전자레인지가 8970엔(약 8만9000원)에 팔리고 있다. 물론
전자레인지 역시 원산지는 중국이다.

중국가전의 저가(低價) 공세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일본·유럽 등
선진국 시장도 초토화시키고 있다. 중국은 현재 미국·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제조업 기반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산 카메라는
이미 세계 시장의 50% 이상을 점령했으며, 에어컨과 TV는 각각 30%,
식기세척기는 25%, 냉장고는 20% 가량을 차지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파이낸셜타임스와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등 해외 언론들은
최근 중국의 저가 공세가 전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의 최대 시장인 줄 알았던 중국이 세계 최대의 생산기지로
탈바꿈하면서 전 세계 가전제품의 가격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필립스전자는 지난 1980년대 초반 중국 내수시장
공략을 위해 현지 공장을 건립했지만 지금은 23개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3분의 2를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는
"필립스뿐 아니라 GE·도시바·삼성전자 등 유수의 전자업체들이 중국을
생산기지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들 다국적기업의 진출로 중국산 제품의
수준도 눈부시게 향상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가전은 또 미국·유럽·동남아 등 세계 시장 곳곳에서 한국산
제품을 밀어내고 있다. 중국은
컬러TV·전자레인지·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 주요 가전 분야에서
지난 4년간 연평균 40% 이상의 급격한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한국은
연평균 9.4%에 그쳤다. 특히 세계 최대의 수입 시장인 미국의 경우
한국산 제품은 지난 4년간 에어컨을 제외하고는 시장점유율이 답보
상태를 보였지만 중국산은 20% 포인트 이상 확대됐다.

게다가 다국적기업의 중국 투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올해 중국에
대한 외국계 기업의 직접투자 규모는 무려 500억달러에 이르고, 늘어난
투자액만큼 질 좋고 값싼 중국산 하이테크 제품이 전 세계 시장을 무차별
공략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