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종로 영풍문고 건물 10층의 UBS워버그증권 서울지점
트레이딩 룸.
13명의 트레이더(trader·고객의 주식 매매 주문을 처리하는 사람)를
지휘하는 안승원 부지점장(35)은 손을 대지 않고 통화할 수 있는 헤드셋
전화기를 통해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쉴 새없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 도중에도 눈으로는 5~6개의 모니터를 주시하며 시장 정보를 쫓는다.
안 부지점장은 "하루 종일 50여통의 전화 통화를 통해 세계적
연금·기금, 펀드 등 외국인 기관투자가들의 매매 주문을 받거나, 투자
정보를 교환한다"라고 말했다.
새벽 6시30분에 시작되는 안씨의 일과는 주문이 시작되는 오전 8시부터
'실전(實戰)'으로 접어든다. 컴퓨터와 전화기가 총과 칼을 대신할 뿐,
오후 3시40분까지 매매 시간은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을 제외하곤 대부분 점심식사도 샌드위치로 대신할 정도. 한국
주식이 세계로 팔려 나가는 '최전선(最前線)'의 숨가쁜 풍경이다.
하지만 사실 안 부지점장과 같은 증권사 트레이더는 진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심부름꾼' 격이다. 전주(錢主)인 진짜 외국인투자자는
플로리다나 모나코의 어느 별장에 느긋하게 앉아 가끔 트레이더나
펀드매니저들의 보고나 받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외국인투자자의 모습은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에의
주식 투자를 위해 금융감독원에 등록한 외국인투자자의 수가
1만3684명(7월말 현재)이라는 등의 '드라이'(dry)한 통계 수치를 통해
코끼리 뒷다리 만지는 식으로 어림잡는 정도다.
외국인투자자의 '육화(肉化)'된 모습이 드러나는 아주 드문 경우중
하나는 외국계 운용회사의 한국 담당 펀드매니저를 통해서이다. 이들도
따지고 보면 외국인 거액 전주(錢主)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서울증시에만 수조원의 투자를 실제로 집행하는 그들의 파워 (power)
역시 엄청나다.
푸트남·쟈딘플레밍에셋매니지먼트·캐피탈그룹 등 한국 증시에 투자를
많이 하는 투자회사의 펀드매니저가 한국에 뜨면 국내 상장기업에는
비상이 걸린다. 기업 방문을 나온 그들에게 밉보여 자칫 그들이 주식을
팔고 떠나기라도 하는 날엔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회사가 자금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보스턴에 본부를 둔 세계적 투자회사 푸트남의 경우 국내
간판기업인 삼성전자 총주식의 4.1%를 보유, 이건희 회장 일가(지분
3.5%) 보다 주식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이 투자회사의 한국 담당
펀드매니저는 카멜 피터스라는 이름의 40대 중반 여성. 그는 부하 직원을
공공연히 자신의 '노예'라고 부를 정도로 터프(tough)한 성격에 코스닥
종목 투자도 가리지 않는 공격적 운용 전략으로 유명하다.
또 JP모건그룹 계열의 쟈딘플레밍에셋매니지먼트는 데이빗 최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서울 증시를 맡아 4~5조원을 굴리는데,
대신증권·대구은행·신도리코 등의 주식을 5% 이상씩 대량보유하고
있다.
외국 펀드매니저들은 투자한 기업을 수시로 방문해 까다로운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모 재벌그룹에 수년전 한 외국계 펀드매니저가 찾아간 일이
있었다. 펀드매니저는 그 그룹 총수가 연예인과 염문(艶聞)을 뿌리고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회장님은 요즘 매일 출근하십니까,
근무시간은 매일 몇시간 정도됩니까" 등등의 곤란한 질문을 쏟아부었다.
곤란해진 IR(기업설명) 담당 임원은 낯을 붉히며 면담을 사절했다고
한다.
한국 증시가 외국인투자자에게 개방된 지 10년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어느새 외국인이 갖고 있는 주식은 100조원을 넘어 증시 전체의 35%에
육박하며,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서울 증시는 출렁인다.
외국인투자자는 어느새 한국 증시의 주연(主演) 배우로 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