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의 전직 임직원들에 대한 예금보험공사의 부실책임
조사가 마무리되면서 각 해당은행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배상소송을
본격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자 금융권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6일 추가로
밝혀진 피(被)소송자들은 은행장급만 10명으로 늘어났고, 전체
소송액수는 9800억원 상당으로 파악됐다.

한국의 은행들이 과거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했던 선배들에게 대규모 손배소를 제기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IMF 외환위기가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고의나 불법이 아닌 경영상 과실로 평생 모은 재산을
내놓아야 할 위험에 처한 전직 임원들이 반발할 경우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 누가 왜 소송 당하나 =이번에 손배소를 당하는 6개 공적자금투입 은행
임직원 100여명은 공적자금 투입시점부터 3~4년 이전까지 발생했던 은행
부실대출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주로 지난 1995~98년 사이에 기업대출 결정 라인에 섰던 임직원들이다.
은행장으로는 한보·대우그룹을 지원했던 제일은행의 이철수·신광식씨가
손배소를 당하게 됐다. 한일·상업은행이 합병한 우리은행(옛
한빛은행)은 이관우·김진만 전 행장, 서울은행은 손홍균·장만화 전
행장이 소송에 휘말리게 됐다. 조흥은행은 우찬목·장철훈 전 행장이
소송 대상이며, 평화은행의 박종대 전 행장과 경남은행의 김형영 전
행장도 포함됐다.

예보측은 이들의 부실책임을 입증할 만큼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예컨대 신용평가기관 평가 결과 대출하면 떼일 위험이
높다고 판정한 투기등급의 기업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거나, 대출한도를
훨씬 초과해 돈을 빌려줬다는 설명이다. 또 이사회 등 정식 의결기구를
거치지도 않고 거액을 대출해준 경우도 많다고 예보는 밝혔다. 예보는
현재 진행 중인 농협·수협·한국투자신탁·광주은행 등 4개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도 오는 9~10월쯤 손배소 대상자를 추가로
확정·통보할 계획이다.

◆ 확산되는 금융권 파장 =금융권은 이번 손배소 사태를 계기로 은행들이
기업대출에 더욱 위축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 전직
은행임원은 "앞으로는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기업에 돈을 대주고 기업이
돈을 벌어 갚아가는 과거의 활발한 대출관행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떼일 염려가 있는 기업에는 대출을 기피하게 되고,
이 경우 경제여건이 나빠질 때 돈흐름이 막히는 신용경색을 부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예보의 일방적인 조사와 손배소 요구를 원망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한 은행 임원은 "공적자금 투입 은행에 대한 부실책임 규명도
좋지만 국민정서만 앞세워 면피성 조사를 벌이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대출압력을 넣은 정치권이나 관료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들이다.

소송을 당하는 임직원들은 당장 재산상 불이익에 직면하게 된다. 은행이
손배소를 제기하면 당사자들의 재산을 가압류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기대하기 힘들다. 많은 전직 임직원들은 떳떳하게 재산을
밝히기보다 자신 명의의 부동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거나 아예
팔아버려 피해를 최소화하려 시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숨겨놓은
재산이 늘어나면 거꾸로 은행들의 손실보전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소송을 당하는 전직 은행 임직원들은 상당한 정신적 고통에도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올 연초 손배소를 당한 전 제주은행장 김 모씨는
지난 4월 안타깝게도 자살을 택했다. 이번에 조사를 받고 소송을 당하게
된 한 전직 은행장은 "소명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인원 예보 사장은 "손배소를 당하게 된 임직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민세금인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만든 부실책임은
마땅히 누군가 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