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성장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정상의 실력을 갖춘 한국인들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이 젊은이인 이들 중에는 국내보다는 오히려 세계의
무대에서 더 알려진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일보는 세계 톱에 접근한
사람들을 발굴해 집중 조명한다. 이들의 스토리는 우리를 견인하고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분발하게 만들 것이다. ( 편집자 )
"인간의 신체는 탄소 등 90여가지 원소로 이뤄졌습니다. 별의 생성소멸
과정에서 이 원소들이 나와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죠. 그런 뒤 태양계가
만들어지고 인간이 탄생합니다."
연세대 도서관 뒤편에 있는 연구동(棟) 건물. 2층 복도 입구에는
'자외선 우주망원경 연구단'이라는 작은 현판이 붙어있다. 이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이영욱(41) 교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이런 시선으로
하늘을 연구해온 그에게 인간세상이란 얼마나 시시한 것일까. 그런데
그는 "인간은 하찮고 미약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인간의 수명은 80년, 태양은 100억년. 하지만 인간이 지구에서 살기
위해, 그 전에 우주의 진화 운동이 80억년 이상 진행됐다고 할 수 있죠.
땅 밖으로 1주일의 화려한 외출을 한 매미에게 땅 속의 7년 세월이
감춰진 것처럼. 내 육신 안에 우주의 역사가 다 담겨 있어요.
개·소·돼지도 우주의 축소판입니다. 식물은 물론 땅·공기·책상
모두가 그렇지요."
이 단정한 사내의 연구실은 어수선하다. 탁자 위에는 날짜가 지난
과학학술지(誌) '네이처'가 보인다. 99년 11월 4일자다. 은하(銀河)의
형성 과정에 관한 그의 논문이 실려있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무리.
은하는 하나의 거대한 가스 덩어리가 수축해 형성된 걸로 알려져 왔다.
그는 통설에 도전했다. 여러 개의 가스 덩어리가 충돌하고 융합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구의 남반구에서 볼 수 있는 '오메가
센타우리'라는 별의 관측자료로 이를 입증시켰다. 은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반덴버그(캐나다) 박사는 "이번 발견은 획기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일찍 세계 무대의 조명을 받았다. 지난 89년 미국 예일대의 박사
과정 시절. 별의 나이를 계산하는 '샌디지' 이론의 오류를 정정했다.
당시 천문학계의 원로인 샌디지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그를 만나러
왔다.
"샌디지 박사는 어린 시절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지구과학 교과서에도
샌디지의 '항성(恒星) 진화'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론을 실제
적용하면 별의 나이가 맞지 않을 때가 생겨요. 천문학계의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밥 먹을 때나 걸을 때나 잠 잘 때나 늘 이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잠들어도 뇌는 활동하죠. 어느 날 잠자다가 샌디지의
오류가 번쩍 떠올랐어요. 다음날 컴퓨터를 통해 계산한 결과를 본
지도교수는 '오 마이 갓'이라며 외쳤습니다."
그의 논문은 예일대 최우수 박사 논문상을 받았다. 그 해 36회나 인용돼
세계 13번째로 인용 횟수가 많은 논문이 됐다. 영국왕립천문대가 선정한
우수논문으로도 뽑혔다. 4년 뒤 그는 이 논문을 발전시켜 '헬륨
연소단계 항성의 진화모델 시리즈II'를 발표했고, 95번이나 인용됐다.
그를 천문학자로 만든 것은 '아폴로 11호'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1969년) 아폴로의 달 착륙 장면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돈이나
명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았고, 바로 우주의 근원을
밝히는 천문학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이미
고교용 지구과학 교과서를 독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하늘의 별자리를
다 익혔다. 혼자서 늘 무언가를 조립하고 실험하는 그는 집안에서 '이
박사'로 통했다.
"요즘도 우리 아들과 함께 그러한 공작 놀이를 하는 게 취미예요. 지금
제가 하는 '자외선우주망원경' 프로젝트도 이런 공작 놀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규모가 크고 예산이 많이 든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90∼93년 동안 허블펠로십(장학금)을
받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했다. 그 시절 또 은하 형성에 관한
문제의 논문을 발표했다.
"먼저 은하의 중심이 형성된 뒤, 은하의 나팔선(가장자리)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지요. 은하가 바깥에서 생긴 뒤 가스구름이 수축돼
안쪽이 만들어졌다는 종전의 이론을 뒤엎은 겁니다. 이러한 저의 학설은
주목을 받았고 나중에 입증됐지요."
이러한 경력으로 그의 연구단은 지난 97년 말부터 미국 항공우주국과
캘리포니아 공대, 프랑스 우주천문학연구소 등과 함께
자외선우주망원경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NASA와 공동파트너가 된 것은
국내 처음이다. 그는 연구단 조직에 나섰다. 외국에서 활동하던
선후배들이 속속 합류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서 현실적인
이해를 덜 따지는 편이라 연구단의 조직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천문대에서 근무했던 손영종(40) 연구교수는 "우리 연구단
14명이 아무런 불화 없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해온 것은 한국
상황에서는 드문 사례"라며 "이영욱 단장은 천문학 연구 분야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전체 흐름의 파악에 탁월하다"고 말했다.
특히 망원경을 인공위성에 탑재하는 기술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영국
런던대의 선임연구원 김석환(44) 박사도 포함됐다. 영국 생활 11년에
아예 영주하려던 그가 후배 밑으로 들어왔다.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국내 우주과학의 비전을 위해 합류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영욱 교수도 그런 고민이 있었다. 우주항공국의 근무가 끝날 즈음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교수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짐을
쌌다.
"무한 광대한 우주에서 지구는 간신히 살아남은 존재와 비슷하죠.
국경을 초월하는 게 우주연구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제가 겪은 것은
동양인의 연구를 과소평가하려는 편견이었습니다. 자연히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닌가 라는 회의도 들었지요. 과거 해양시대에는
항해의 위치와 시간을 알기 위해 경도(經度)를 찾는 경쟁이
불붙었습니다. 앞으로는 우주 개발에 앞서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겁니다."
범인(凡人)의 참을 수 없는 질문. 우주에는 우리와 비슷한 생명체가 또
있을까?
그는 "영화에 나온 ET를 말합니까?"라고 물은 뒤, "지구와 비슷한
행성(行星)을 갖고 있는 별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와
같은 환경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설령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다고
해서 생명이 있을는지도 알 수 없죠. 아직 실험실에선 생명체를 만들어
낸 적이 없어요. 아메바·짚신벌레도 못 만들죠"라고 말했다.
마지막 대화는 이렇게 진행됐다.
―당신에게서 연구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우주의 나이를 밝히는 것입니다. 정확한 우주의 나이를 알면 우주
생성의 비밀을 상당부분 풀게 되겠지요."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더욱 눈이 나빠지겠군요.
그는 안경을 썼다.
"천체망원경은 눈으로 보는 것은 20세기 초반까지의 얘기입니다. 사람의
눈은 빛에 둔해요. 사람의 눈보다 열배 백배 더 예민한 디지털 CCTV가
망원경에 부착되어 있죠. 우리는 통제실의 컴퓨터를 통해 망원경이 본
영상을 보게 됩니다."
―오호, 낭만이 없군요.
"디지털 시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