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은행들 모시기 경쟁…선진 금융기법으로 무장했다지만…
외국은행 출신들은 정말 돈 장사의 귀재들일까. 선진 금융기법으로
무장했다는 국내 외국은행 출신들이 최근 시중은행 임원으로 잇따라
중용되면서 이들이 과연 부실채권으로 엉망진창이 된 시중은행의 경영을
쇄신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3월 30일 서울 금융가는 씨티은행 소비자금융그룹 대표
하영구(48)씨가 한미은행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술렁거렸다. DJ정부
출범 이후 외국은행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또 한명의
스타를 배출할지 여부에 시선이 집중된 것이다. 특히 그는 국내 최초의
40대 은행장으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 대표의 한미은행장 입성 여부는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고 있다.
한미은행측은 "신동혁 행장이 겸임하던 CEO 자리와 이사회의장 자리를
분리하는 안을 오는 5월17일 임시주총에 상정할 계획"이라면서 "하
대표의 취임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하 대표도 자신의
거취에 대해 안팎의 궁금증이 증폭하자 직원들에게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니다'는 원론적인 내용의 메일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금융가에선 한미은행 지분 40%를 갖고 있는 최대주주
칼라힐측이 하 대표의 '능력'을 높이 사 은행장 직을 맡기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한미은행 관계자도 "신 행장은 CEO직을
내놓고 이사회의장 직만을 맡을 예정"이라고 말해 새 은행장의 임명을
기정 사실화했다. 전남 광양 출신의 하 대표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 노스웨스턴대 석사를 딴 뒤 지난 81년 씨티은행에 입사해
자금담당 이사, 투자은행사업부문장, 기업금융사업부문장을 거쳤다.
98년부턴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소비자금융그룹 대표를 맡고 있다.
■씨티은행 출신들 활약 두드러져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은 지난해 5월 강정원(51) 행장이 취임한 후
크게 변모했다. 외국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강 행장이 보수적인
시중은행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강 행장은 취임 후 각
사무실에 붙어 있던 행장의 소재를 알리는 '재실등'을 없앴다.
재실등을 부하 직원들이 윗사람 눈치나 보는 장치로 여긴 것이다. 또
부서장을 독방에서 몰아내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는가 하면,
점심을 햄버거로 때우면서 회의를 하기도 한다. '기관'으로 불리던
과거의 국내 시중은행에선 상상도 못하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강 행장은 이력에서 벌써 국제 감각의 소유자란 사실이 느껴진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초등학교, 한국에서 중학교,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각각 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학업을 마친 그는 79년 씨티은행 뉴욕 본사에 입사한 뒤
서울지점을 거쳐 뱅커스트러스트 한국대표, 도이체방크 한국대표를
역임하는 등 국내 외국은행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다.
강 행장이 움직이는 서울은행은 현재 이사회 임원 11명 중 6명이
외국은행 출신이다. 미국인 데이비드 워너 부행장을 제외하고도
장형덕(51) 원명수(54) 배전갑(54) 부행장, 김명옥(45) 상무 등이 주로
외국은행에서 경력을 쌓았다.
서울은행 외에도 국내 금융가에 외국은행 출신들의 유입은 올해
들어서도 그치지 않고 있다.
4월 초 공식 출범한 우리금융지주회사는 재무담당 부회장(CFO)에
민유성(47) 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 사장을 영입했다. 민 부회장은 외국계
은행과 증권회사에서만 20여년간 근무했다. 신한은행도 올해 주총에서
처음으로 씨티은행 출신인 오용국(52) 상무를 영입, 기업의
신용관리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제일은행엔 지난해 1월 영입된 이수호
여신총괄 상무가 뱅크오브아메리카 서울지점에서 활약한 외국은행 출신.
20대 후반에 유학갔지만 '원어민 같은' 영어를 구사한다는 최원규
소매금융 담당 상무는 후지은행 뉴욕지점 출신이나 10여년 전 옮겨와
최근의 영입 바람과는 다른 케이스. 하나은행엔 씨티은행 전산담당
부행장을 지낸 전산전문가 송갑조(54) 부행장이 지난해 영입됐다.
외국은행에선 특히 씨티은행 출신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진다. 씨티은행
출신들은 비은행 금융권으로까지 진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굿모닝증권
도기권(44) 사장과 이흥주 상무, 김두헌 이사, 제일투자신탁증권
황성호(48) 사장, 안재범 이사, 교보생명 구안숙(46) 상무 등이 금융가의
대표적인 씨티은행 출신들이다.
외국은행 출신들이 국내 금융가 임원진에 포진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최근 2~3년 사이의 일이다. 과거엔 국내 외국계 금융기관에 가는
사람들은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이들은 국내 금융기관에 진출하는
동급생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받는 반면 금융기관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직장생활의 최종 목표로 설정하기 어려웠던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과거엔 외국은행 내에서도 대표자리는 본국 출신이나 최소한
아시아 지역대표들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채 출신이나 경제부처
고위 관료 출신들이 독차지하던 국내 금융기관의 임원진 자리는
언감생심이었다.
이런 성향의 외국 금융기관 출신들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IMF가 터진
이후다. 외국 금융기관 출신들이 'IMF의 최대 수혜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변화의 배경엔 정부 최고위층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은 금융개혁 작업에 선진
금융기법에 정통한 외국은행 출신들을 많이 등용하라고 주문했다는 것이
개혁작업에 간여한 인사의 전언이다. 이에 따라 외국계 은행의 금융
전문가 50여명의 명단이 작성되어 상부에 보고됐고, 특히 경력이 좋은
20여명은 상급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또 여성들의 중용도 주문, 외국계
은행에 많이 진출해 있던 여성들 중 일부가 시중 금융기관 임원진과
금융감독원 간부직에 진출하는 길을 터주었다.
이와 함께 정치적 배경도 인선에 작용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관측이다. 집권당 실세와의 친분, 공동정권에 따른 지연, K고 학맥 등이
무시못할 요소였다는 것이 발탁 작업을 지켜봤던 한 인사의 전언이다.
능력도 있고 본인도 희망하고 있으나 아예 관심조차 끌지 못한 경우는
집권당과 관련없는 지역 출신이거나 비 명문고 출신이란 약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사실 외국 금융기관 출신들은 나름의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국내 금융기관 종사자들도 인정한다. 가령 외국
금융기관의 인사고과는 철저한 실적주의에 바탕하는 만큼 이곳 출신들은
직장생활 초기부터 실력 제일주의가 몸에 배 있다. 미국계 투자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C씨는 "외국 회사는 전체 인원 중 돈을 벌어줄
일부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시스템"이라면서 "우리는 공채생 수백,
수천명을 똑같이 교육시켜 회사의 재원을 낭비한다"고 지적했다.
또 전문가를 양성하고 우대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어 최근 전문가를
우대하는 사회 흐름에 부합하고 있다. 영어구사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강점. IMF 이후 외국자본이 국내 금융기관까지 잠식하면서 외국
자본주들이 당장 의사 소통이 원활한 외국 금융기관 출신들을 선호했다는
설명이다.
■"낙후된 국내은행 시스템이 문제"
국내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상대적인 '국제경쟁력 상실'도 이들의
부상에 한몫했다. 한 시중은행원은 "과거 시중은행은 거듭되는 순환
보직, 실적보다는 연공을 중시하는 인사, 자율적 경영을 방해하는
관치금융 등으로 전문가를 키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또
"솔직히 과거 국내은행은 외국은행에 진출하는 사람들보다 뛰어난
엘리트들이 가는 직장이었다"면서 "그러나 국내의 낙후된 금융시스템
속에서 무능력자로 전락해버린 꼴"이라고 억울해 했다.
그러나 이렇게 '패배주의'에 젖은 고위 간부층과는 달리 중간 간부층
사이에선 외국계 금융기관 출신의 유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중간 간부는 "외국은행 국내 지점의 규모는 국내 시중은행
규모에 비할 바가 못된다"면서 "거대한 조직운용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사들에게 유행처럼 임원 자리를 내주는 것은 '금융 사대주의'"라고
혹평했다. 더욱이 중간 간부층이나 최근 입사한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해외 유학파가 적지 않아 국제화 면에서도 외국 금융기관 출신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또 외국계 금융기관의 혹독한
실적주의는 능력 있는 사람들도 중도 탈락시키기 위한 무자비한 인사
시스템으로 국내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외국계 금융기관 출신들에 대한 평가는 결국 앞으로 이들이 내놓는
실적으로 판가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서울은행 강정원 행장은
서울은행의 경영을 이른 시일 내에 정상화시켜 해외매각을 성사시킬
계획이라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홍보실 안영근 과장은 "지난해
적자 규모는 5100억원이었으나 올해엔 상반기에만 수백억원의 흑자가
예상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50세이던 지점장 평균 나이는
5세나 낮아질 정도로 물갈이 인사가 단행되기도 했다.
씨티은행 하영구 대표는 외국은행계에선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인물.
소비자금융 부문을 맡은 후 발로 뛰는 영업으로 IMF 이후 국내은행을
꺼리던 개인 자산가들을 유치하고, 과감한 조직개편으로 비용을 절감하는
등 경영수완을 발휘했다는 평. 하지만 "그가 큰 조직에 가서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라고 외국은행에 몸담았던 L씨는 말했다.
금융연구원 손상호 박사는 "외국계 금융기관 출신들이라고 해서
금융기관의 개혁을 반드시 성사시킨다는 보장은 없다"면서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채 바람을 일으키려다간 내 부저항에 부딪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일부 은행에선 외부에서 영입된 은행장이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채 겉돌다가 중도 하차했다는 것이다.
외국계 금융기관 출신들이 이끄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앞으로 어떤
성적표를 내놓을지 금융가의 눈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