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가 오르긴 했지만, 관제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8일 서울 증시는 개장초만 해도 강보합 수준에서 게걸음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 개최된 김대중 대통령과 증권사 사장단 간담회에서
김대통령이 연기금의 주식 투자 규모를 늘린다는 발언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미리 전해지면서 오름폭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날 미국시장에서 나스닥이 2% 이상 하락한데다, 이날도 외국인은 내리
나흘째 주식 매도 우위를 보였기에 대통령의 이 발언이 아니었다면
주가가 이렇게 오르리라고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날 청와대의 발표는 상당히 공격적인 것이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등 연기금은 현재 총자산의 10%인 8조 정도를 주식에 투자하고 있으나,
이를 빠른 시일 내에 총자산의 20%인 25조로 늘린다는 내용이다.

연기금을 통한 주식투자 확대는 주가가 나쁠 때마다 정부가 단골로
써먹던 메뉴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직접 구체적인 투자 규모
수치까지 거론함으로써 연기금이 감히 거스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재경부는 이날 연기금 주식투자 확대가 2~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으나, 충격요법식으로 단기간에 급격히 늘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경부는 작년 10월에도 「연기금 주식투자 제약요인 해소방안」을 발표,
연기금 투자 확대를 유도해 왔다. 이에따라 지난해 연기금 전용펀드
1조8000억원이 설정돼 지난 1월19일까지 1조4000억원이 주식에
투자됐으며, 정부는 조만간 연기금 전용펀드를 3조원 규모로 늘릴
예정이다.

증시 전문가들은 연기금이 실제 주식투자에 나서는 시기와 규모가 관건이
되겠지만, 일단 연기금 주식투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시장에 하방
경직성은 확보됐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주식시장이 본격적으로 회복세를
타려면 경기와 구조조정 등 펀더멘털(경제 기초체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삼성투신운용 김기환 상무는 『연기금 투자는 수급에 큰 호재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주가를 지지하는데 불과하고 펀더멘털 개선
없이는 추세적 상승은 불가능하다』며 『연기금이 계속 산다 하더라도
외국인이 팔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연기금이 준비없이 무리하게 주식투자에 나설 경우 연기금 가입자와
국민 경제, 그리고 주식시장에 장기적으로 짐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A펀드평가회사 사장은 『(정부의 주식투자 독려로) 연기금의
운용의 자율성은 이미 떨어져 있다』며 『이번에도 정부가 무조건
늘리라면 연기금으로서는 일단 방침에 따르되 주식투자 실패시 책임을
모두 정부에 전가할 수 있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증시 전문가들은 또 연기금이 똑같은 시기에 일제히 주식투자에 나서는
것은 분산투자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리퍼코리아 이인섭 사장은
『증시 발전을 위해 연기금의 주식투자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연기금과 기관투자가의 운용 효율성과 전문성, 투명성을 보강하면서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