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백남의 .

경북 성주군에서 칠곡군 약목면으로 옮겨와 살던 박정희의 조부
박영규는 장남 박성빈을이웃 마을 수원백씨문중의 처녀 백남의에게
장가를 보낸다. 동학농민봉기, 청일전쟁, 갑오경장으로 나라가 어
지럽던 1894년 직전으로 추정된다. 수원백씨 집안은 임진왜란 이후
이곳으로 들어와서 대대로 살아왔다. 백낙춘의 딸인 백남의는 남편
보다 한 살 아래였다. 백남의는 비교적 유복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 시집올 때까지는 큰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문을 다
떼고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같은 언문소설을 즐겨
읽었다.

박성빈이 결혼할 때 그의 부친인 박영규는 약목에서는 부농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약목평야'란 말을 들을 만큼 농지가 넓은 이 마
을에서 그는 많은 소작농을 거느렸다. 박재석은 그의 아버지 박무
희(박정희의 둘째 형)로부터 "너의 증조부댁은 가을철이면 소작농
들이 가져다 놓은 쌀가마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
랐다.

박영규는 1914년2월24일 74세로 약목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적지 않은 재산을 막내인 박일빈에게 물려주고 큰 아들인 박성빈은
무시했다. 박성빈이 홀대를 받은 이유는 그가 벼슬을 한다고 논밭
을 팔아 가산을 탕진했다든지 동학군에 가담했다든지 술을 좋아한
다든지 하여 농사나 가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
와 상모리 주변사람들사이에서는 '박성빈이 아버지로부터 쫓겨났다'
는 표현도 있을 정도이다. 1962년에 이낙선(당시 최고회의 의장 공
보비서)소령이 작성한 비망록에는 '박성빈공이 칠곡에 거주할 당시
생활에 궁함을 느낀 백씨가에서 현 상모동 뒷산에 위치한 수원백씨
(산음공파)의 선영묘 아래 위답 8두락의 경작권을 주어 6남매를 데
리고 이사'라고 적혀 있다. 박성빈이 선산군 상모리로 이사를 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2년 뒤였다. 아버지로부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게 되고 막내동생한테 신세를 지자니 자존심이 상할
형편인데 처가에서 도움의 손을 뻗친 것이다. 박성빈의 둘째 아들
무희가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재생하면 이렇다.

"아버지께서 이래저래 먹고 살 길이 막히고 해서 고민하자 너의
작은 외삼촌이 '우리 집 선산 밑에 땅이 좀 있는데 그것이라도 부
쳐먹으면서 살면 안되겠습니까. 여덟 마지기 되는데 시월에 시제
한번만 지내주면 되니까 식구들이 굶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했거든.
그래서 여기로 온 거란다.".

상모리에 살면서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
면 때때로 아이들을 데리고 약30리를 걸어서 약목의 시동생 박일빈
가로 양식을 얻으러 갔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인
다음 밥이라도 먹여 데려올 심산이었을 것이다"고 박무희는 아들에
게 말하곤 했다. 박무희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한 사건을 아들에게
되풀이해서 들려주곤 했다.

박정희가 태어난 2년쯤 뒤의 겨울이었다. 백남의는 여섯 살 난
재희를 업고 세 아들 무희, 상희, 한생을 데리고 약목 시동생 집에
갔다. 보리밥 한 그릇씩을 툇마루에서 얻어먹고 있는데 박일빈의
장모가 들어왔다. 박일빈은 장모에게는 '단지밥'(단지 같이 큰 밥
그릇에 그득 담긴 쌀밥)을 해서 대접하더라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
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백남의는 겉보리 반 자루를 머리에 이
고 재희는 무희에게 업히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길을 몇번이나 미
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걸었다.

1926년에 출판된 선산읍지에는 성씨현황이 있고 97개 성씨가 모
여 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에는 유독 고령박씨는 나오지도
않는다. 피붙이가 없는 이성촌으로 이사해온 박성빈가가 처가의 산
지기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삶의 뿌리를 내리는 데는 이웃으로부터
의 괄시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수모
를 당했을 백남의에 대해서 상모리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은 '자존
심이 대단한 여자'요 '독하면서 자상하고 가냘픈 여자'였다. 남편
에 대해서 불평 한 마디를 남긴 흔적이 없고 가난속에서도 동그란
돋보기를 쓰고서 언문소설을 즐겨 읽곤 했던 인물이다.

백남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담뱃대에 불을 붙여드리는 심부름
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긴 장죽에 담뱃불을 붙이려면 아주 길게
몇모금을 빨아야 했다. 어린 아이로서는 쉽지 않은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담배를 배워버렸다. 박성빈은 시집온 아내의 이 기호를 살
려주었다. 자신이 먼저 아내에게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태어난 뒤에도 박성빈의 장죽은 방안의 화로에 꽂혀 있고 백남의의
궐련 '마구초'는 그녀의 쌈지 속에 담겨있곤 했다.

박성빈과 백남의의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은 한량
의 기질이 있고 아내는 알뜰한 주부였으니 오히려 그런 다른 성격
때문에 충돌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이런 부모 때문에 박정희는 비록 가난한 몰락 양반 집안에서 태
어났지만 마음까지는 가난하지 않게 성장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유아기 시절엔 나이로 치면 아버지뻘 되는 큰 형 박동희는 만주에
서 장기간 방랑하고 있었고, 둘째 형 무희는 결혼하여 이웃에서 살
고 있었다. 그 아래 큰 누님은 시집가서 딸을 낳고는 가끔 와서 젖
이 안나오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막내동생 정희에게 젖꼭지를 물려
주고 있었다. 셋째 형 박상희, 넷째 형 박한생, 작은 누님 박재희
모두 정희를 귀여워 해주었다.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사랑과 귀여움
을 듬뿍받고 자란 것이 박정희였다. 유아기의 이런 환경은 건전한
인격의 바탕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특히 어
머니의 어릴 때 사랑은 박정희가 성장하여 숱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한 용기와 의지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영웅을 만드는
것은 훌륭한 어머니이다'는 하나의 법칙은 박정희의 경우에도 예외
가 아니었다. 박정희에게 끼친 어머니의 영향은 그의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1978년8월13일(금) 비. 어머님 돌아가신 29주째 기제일이다.
1949년 음력7월10일 어머님께서는 구미군 상모면 옛집에서 노환으
로 타계하셨다. 어머님 연세79세. 내 나이 32세. 7남매 중 제일 막
둥이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어머님을 32년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32년간이라고는 하나 대부분 객지에 있었으므로 직접 집에서 모
신 것은 훨씬 짧은 시간이 될 것이다. 서재에 간소한 젯상을 차려
놓고 영정 앞에서 분향하면서 어머님의 명복을 빌다. 조용히 눈을
감고 어머님 생전의 지극하신 사랑을 되새겨본다. 이 세상에서 어
머님처럼 나를 사랑해주신 분은 없으리라. 어머님의 사랑은 하늘보
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다 하겠다. 어머님 생전에 못다한 효도,
이제 후회한들 막급이라.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대통령으로서 성심
성의를 다해 선정에 힘써서 보다 부강하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건설
하여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일. 이것이 어머님 은혜에 보답하는 유
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조국의 발전상을 천국
에 계시는 어머님께서도 보시고 기뻐하시리라. 어머님 길이 길이
홍복을 누리옵소서.(하략)]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이라고 한다. 울거
나 웃을 때 반응을 보여주는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데서 심리적 안
정을 갖게 되고 고난을 헤쳐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용기로 전환되는 이 공식이 박정희에게도 정확히 적용되었
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선정을 베푸는 것이 어머니의 사
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서양 기독교 문화권의 '공
익을 위해서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린다'와 비슷한 신
념 구조이다. 한국인에게는 좋은 어머니를 가진다는 것이 가슴 속
에 신을 품고다니는 것과 비슷한 든든함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