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는 뛰어난 위장술을 갖고 있다. 피부의 색소를 늘리거나 줄여 바위와 같은 색으로 변해 천적을 속인다. 과학자들이 문어에서 영감을 받아 상황에 따라 변하는 합성 피부를 개발했다. 앞으로 로봇이나 디스플레이에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인간에게 소중한 '나의 문어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마크 브롱거스마(Mark Brongersma) 미국 스탠퍼드대 재료공학과 교수 연구진은 "문어가 피부를 조절해 바위로 위장하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으로 색상뿐만 아니라 표면의 질감까지 바꿀 수 있는 인공 피부 소재를 개발했다"고 8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문어 색소와 돌기 변화 모방
문어가 근육을 이완하면 피부에 있는 크로마토포어 색소들이 축소돼 색이 옅어진다. 반대로 근육을 수축하면 색소가 펼쳐져 진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몸통의 색을 바꾼다. 문어는 피부 질감도 바꾼다. 근육을 움직여 피부에 돌기나 홈을 만들면 빛이 산란되는 형태가 달라진다. 이런 방식으로 매끄러운 피부를 순식간에 바위 표면처럼 울퉁불퉁하게 바꿀 수 있다.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태양전지나 전자회로에 쓰는 고분자 물질로 인공 피부의 표면을 만들었다. 이 물질은 문어의 근육 역할을 할 수 있다. 물과 접촉하면 팽창하지만, 알코올 같은 다른 액체에 노출되면 물을 방출하며 수축한다.
질감을 조절하는 소재를 만들기 위해 먼저 기판에 고분자 물질을 입힌 후 전자빔으로 요철(凹凸) 모양을 만들어 특정 위치마다 물 흡수량이 다르게 했다. 전자회로처럼 위장 패턴을 만든 셈이다. 색상 효과를 내는 광학층도 추가했다. 표면을 투명 필름으로 덮어 물의 흐름을 제어하고 물에 다양한 농도의 알코올을 혼합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물에 젖었을 때 외관이 극적으로 변하는 소재가 탄생했다. 피부의 어느 면이 액체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색상과 질감을 독립적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인공 피부는 20초도 안 돼 색과 질감을 바꿨다. 수백 번 바뀌어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봇과 건물 표면에도 적용 기대
로라 나 리우(Laura Na Liu) 독일 슈투트가르트대 교수는 이날 네이처에 실린 논평 논문에서 "색상과 질감을 이중으로 독립 제어하는 이 시스템은 자연계에서 가장 정교한 위장 시스템 중 하나를 구현했다"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지금은 하나의 패턴만 표시할 수 있지만, 앞으로 더 많은 패턴을 표시하고 색과 질감 변화를 전자회로에서 제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목표로 한 문어 방식의 종이는 색과 질감이 바뀌는 전자책을 연상하면 된다.
논문 제1 저자인 시다르트 도시(Siddharth Doshi) 연구원은 "색상과 함께 생생한 질감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디스플레이도 만들 수 있다"며 "심지어 디스플레이 장치가 스스로 위장할 수 있게 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만약 로봇의 몸에 합성 문어 피부를 붙이면 주변 물체와 구분하지 못하도록 위장할 수 있다.
프랑스 아키텐 광학연구소의 나노광학 연구원 필리프 라라네(Philippe Lalanne) 박사는 네이처에 "전례 없는 방식으로 외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소비재나 건물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도 말했다. 빌딩을 문어 피부로 코팅하면 일조량이나 온도에 따라 외관의 색과 질감이 달라질 수 있다. 도시 풍경이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징어 피부 모방한 사철용 옷감도
같은 방식으로 사철 입을 수 있는 옷도 만들 수 있다.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 연구진은 2024년 문어와 같은 두족류인 오징어의 피부 색소인 크로마토포어의 작동 원리를 모방해 날씨에 따라 열 투과율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섬유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오징어의 피부 색소처럼 섬유 사이에 있는 금속 덩어리를 조절해 외부 환경에 맞춰 적외선 투과율을 바꾸는 섬유 기술을 개발했다. 적외선은 열에너지를 전달한다. 섬유 곳곳에 박힌 금속 섬의 크기와 패턴에 따라 적외선의 반사율이 바뀌는 방식이다.오징어가 피부의 색소 크기를 바꿔 가시광선이 투과하는 비율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위장 무늬를 만든다면, 금속 섬이 박힌 섬유는 적외선 투과율로 온도를 조절한다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열 투과율은 금속 섬의 패턴에 따라 최대 10배 차이가 나 온도 변화가 심한 환경에서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옷을 입은 사람이 방출하는 열에너지를 차단하거나 통과시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험 결과 온도가 높을 때는 금속 섬이 가까이 뭉치면서 적외선 반사율이 높아지고 투과율은 낮아졌다. 착용자의 체온이 오르면 금속 섬이 서로 떨어지면서 적외선을 잘 통과시켜 열을 방출하고, 체온이 떨어지면 금속 섬이 뭉치며 적외선을 반사해 체온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천적의 눈을 속이는 대신, 폭염과 한파를 피하는 기술이다.
참고 자료
Nature(2026),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5-09948-2
APL Bioengineering(2024), DOI: https://doi.org/10.1063/5.0169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