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균에 결합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녹색)의 전자현미경 사진. 파지는 대장균 안에서 증식한 다음 밖으로 나오면서 대장균을 죽인다/Eye of Science

병(病)만 주는 존재로 알고 있는 바이러스가 첨단 기기에 들어가는 광물인 희토류를 친환경적으로 추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생물을 이용해 광물을 얻는, 이른바 생물채광(biomining)이다. 이미 구리 채굴에서 입증된 기술이 미중(美中) 경제 갈등까지 유발한 희토류 채굴에서도 효과를 보였다. 아직 실험실 차원의 성과이지만, 연구가 발전하면 저렴하면서도 환경에 해가 없는 희토류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는 "생물공학과의 이승욱 교수가 유전자를 변형한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바이러스를 이용해 희토류를 추출하는 획기적인 지속 가능한 생물채광 기술을 개발했다"고 지난 12일(현지 시각)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나노 레터스'에 실렸다.

◇희토류 채굴에 친환경 대안 제시

희토류는 원자번호 57번(란타넘)부터 71번(루테튬)까지의 란타넘족 원소 15개와 21번 스칸듐(Sc), 39번 이트륨(Y) 등 17가지 종류가 있다. 전기 자동차와 풍력 터빈에 사용되는 고성능 자석이나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를 밝히는 형광체와 같이 첨단 산업의 필수 소재로 쓰인다.

드물다는 뜻으로 희토류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일부를 빼면 양은 풍부하다. 세륨은 지각을 구성하는 원소 중 25번째로 풍부한 원소로 매장량이 구리와 비슷하다. 다만 다른 광물 원소처럼 농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 채굴이 어렵다. 이 교수는 "이번 바이러스 생물채광 기술은 독성 화학물질과 오염성 폐기물을 배출하는 기존의 희토류 채굴 방식에 친환경 대안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 연구진은 대장균 같은 박테리아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를 재활용 기계로 변형시켰다. 연구진은 바이러스 유전자를 변형해 표면에 두 가지 단백질을 추가했다. 하나는 란타넘족 희토류와 결합하는 '분자 집게'가 되고, 다른 쪽은 피부에 탄력을 주는 엘라스틴 단백질로 온도 스위치 역할을 한다. 바이러스는 온도가 올라가면 응집되면서 포획한 희토류를 농축하고 방출한다.

연구진은 실제 광산 폐수를 사용해 바이러스 생물채광의 효율성을 입증했다. 박테리오파지를 광산 폐수에서 나온 금속 혼합물에 넣었다. 바이러스는 즉시 희토류 원소에만 달라붙었다. 폐수와 박테리오파지가 섞인 용액을 가열하자 바이러스는 서로 뭉쳐 용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액체를 제거하자 바이러스와 희토류가 농축된 침전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침전물의 산성도(pH)를 조절하면 바이러스가 다시 희토류를 방출했다.

이 교수는 "주목할 만한 점은 바이러스들이 희토류 포획과 방출 작업을 완료한 후에도 효과를 잃지 않아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에 감염하면 스스로 복제되어 대량 생산이 쉽고 저렴하다"고 말했다.

UC버클리의 이승욱 교수는 유전자를 변형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로 광산 폐수에서 희토류를 포획하는 기술을 개발했다./UC버클리

◇배터리 소재 포획, 중금속 제거도 가능

이승욱 교수는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텍사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부터 UC버클리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 20년간 유전자 변형 바이러스로 질병과 위험물질을 감지하는 센서와 압력 변화를 전기로 바꾸는 압전 소자 등을 개발했다. 이 교수는 "이번에 개발한 기술이 광산 폐수 외에도 폐전자제품에서 희토류를 회수하거나 환경을 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박테리오파지 표면에 다른 단백질이 나오도록 하면 배터리에 쓰이는 리튬이나 코발트, 촉매용 백금족 금속과 같은 다른 중요한 원소를 선택적으로 포획하도록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물에서 수은이나 납과 같은 독성 중금속을 제거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생물채광은 실험실 연구 수준을 넘어 실제 산업에 활용되고 있다. 박테리아들은 수십억 년 동안 지구에서 암석에 산성 물질을 분비하고 화학반응을 일으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뽑아냈다. 그 부산물로 니켈이나 리튬 같은 전자기기에 필수적인 원소가 나온다. 지구에서 구리와 금의 20%가 이처럼 생물채광으로 나온다.

과학자들은 우주에서도 생물채광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지난 2020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3주 실험한 결과 스핑고모나스 데시카빌리스(Sphingomonas desiccabilis)라는 박테리아가 중력이 거의 없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현무암에서 란타넘, 네오디뮴, 세륨 같은 희토류 원소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생물채광은 이미 대규모 투자를 받는 기술이 됐다. 지난 12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생물채광 스타트업인 엔돌리스(Endolith)가 초기 투자에서 1350만달러(한화 197억원)를 조달했다고 보도했다. 엔돌리스는 곧 두 번째 단계에서 추가로 300만달러를 조달해 총 자금 규모를 약 1650만달러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인공지능(AI)을 적용해 미생물의 구리 채광 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WSJ는 전했다.

국제우주정거장의 배양기 안에서 현무암 속 희토류 원소들을 추출해낸 박테리아인 스핑고모나스 데시카빌리스(Sphingomonas desiccabilis)./영 옥스퍼드대

◇항생제 내성균 잡는 무기로 재조명

희토류를 채굴한 박테리오파지는 의학계에서 먼저 활용됐다. 1917년 프랑스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이 그리스어로 '박테리아를 먹는다'는 뜻에서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줄여서 '파지(phage)'라고 한다. 박테리오파지는 발견 직후부터 치료제로 주목을 받았다. 1920~1930년대 이질과 패혈증 등 다양한 세균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 이용됐다. 하지만 1940년대 페니실린 항생제가 널리 쓰이면서 점점 잊혔다.

박테리오파지 치료제가 최근 재조명받는 것은 항생제의 오·남용 때문이다. 사람뿐 아니라 가축에게도 항생제가 무차별적으로 쓰이면서 배설물 등을 통해 자연으로 항생제가 퍼졌다. 그러자 박테리아는 항생제를 이겨내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 등 항생제 내성균들은 최근 몇 년 새 전 세계로 퍼졌다.

미 국립보건원(NIH)은 "박테리오파지가 항생제 내성균에 대적할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고 밝혔다. 항생제는 병원균을 잡다가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마저 죽이는 것이 단점이다. 박테리오파지는 저마다 감염되는 세균이 따로 있어 이런 문제가 없다. 내성이 생길 우려도 없다. 인간에게 이로운 바이러스가 병원에서 광산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참고 자료

Nano Letters (2025). DOI: https://doi.org/10.1021/acs.nanolett.5c04468

Nature Communications(2020),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0-19276-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