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안과 질환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사람들이 전자 눈 덕분에 다시 책을 읽었다. 안경 카메라가 찍은 영상이 망막에 이식한 전자 칩을 통해 뇌로 전달된 것이다. 환자들은 병원 처방전과 식품 라벨을 읽고 지하철 노선도까지 확인했다. 무선 방식이고 배터리도 필요 없어 상용화 가능성이 큰 획기적인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안과의 다니엘 팔랑커 (Daniel Palanker) 교수 연구진은 "눈 뒤쪽에 이식된 초소형 무선 칩과 첨단 안경이 진행성 노인성 황반변성(AMD) 환자들의 시력을 부분적으로 회복시켰다"고 20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에 밝혔다. 연구진에 따르면 시력을 완전히 잃은 환자 32명 중 27명이 이 장치를 이식받고 1년 후 독서 능력을 회복했다.
◇시력 0.06에서 0.47까지 회복
노인성 황반변성증은 나이가 들면서 시세포(視細胞)를 받치고 영양분을 제공하는 망막색소상피세포가 손상돼 나타난다. 눈은 사물에서 반사된 빛을 수정체로 모아 안쪽의 망막에 비춘다. 여기서 광수용체 시세포가 빛을 전기신호로 바꿔 뇌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망막 세포가 손상되면 시력이 저하되고 심하면 실명에까지 이른다. 50대 이상 인구 중 1%가 걸리는 질병이지만 근본적인 치료제가 없는 실정이다.
연구진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병원 17곳에서 60세 이상 진행성 노인성 황반변성 환자 38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환자들의 시력은 미국식 표기법으로 20/320보다 나빴다. 이는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이 320피트(98m)에서 볼 수 있는 것을 20피트(6m)에서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식 시력으로는 0.0625인 시각장애 수준이다. 시야 가운데를 보는 중심 시력은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임상시험 결과는 놀라웠다. 1년 임상시험을 끝까지 마친 32명 중 84%인 27명이 글과 숫자를 읽을 수 있었다. 환자들은 평균적으로 시력검사에서 다섯 줄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명은 12줄까지 읽었다. 연구진은 "특히 프리마 장치의 안경은 밝기를 조절하고 최대 12배까지 확대도 가능하다"며 "이를 통해 일부 환자는 시력이 20/42(한국식 0.47)까지 향상됐다"고 말했다.
전자 눈은 환자들의 일상을 바꾸었다. 전자 눈을 단 환자들은 책을 읽고 병원 처방전과 식품 라벨, 지하철 노선도를 읽었다. 영국 임상시험을 진행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연구진은 "읽는 능력을 되찾는 것은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키고 자신감과 독립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참가자 중 19명은 안구 고혈압과 주변 망막 파열, 망막하 출혈 같은 부작용을 경험했다. 하지만 위험한 경우는 없었으며, 거의 모든 증상이 두 달 안에 해결됐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무선 전자 칩으로 시세포 능력 회복
팔랑커 교수 연구진은 20년 넘게 노인성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환자를 위해 새로운 전자 눈인 프리마(PRIMA)를 개발했다. '광전 망막 임플란트 마이크로어레이(photovoltaic retina implant microarray)'란 뜻의 영문 첫 글자들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말 그대로 망막에서 빛을 받아 전기를 만드는 칩이다.
프리마는 안경 카메라와 전자 칩, 휴대용 컴퓨터로 구성된다. 카메라가 본 사물의 정보를 적외선 레이저로 망막에 이식한 칩으로 보낸다. 허리에 찬 휴대용 컴퓨터는 인공지능(AI)으로 카메라 영상을 칩이 인식할 수 있도록 처리한다. 망막의 칩은 빛을 전기신호로 바꿔 뇌로 전송한다. 그러면 뇌가 이전처럼 사물을 인식한다.
전자 칩은 가로세로 2㎜ 크기로 광수용체가 손상된 망막 부위에 이식된다. 두께는 30㎛(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로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절반 정도였다. 환자들은 수술을 받고 한 달 뒤부터 전자 눈으로 세상을 보는 훈련을 받았다.
전자 칩은 일종의 전자 광수용 세포라고 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실제 광수용체 시세포는 가시광선에만 반응하지만, 이 칩은 환자가 쓴 안경에서 오는 적외선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칩이 레이저의 적외선에 반응하는 것은 연구진이 환자를 배려한 결과이다.
황반변성 환자는 가운데를 보는 중심 시력은 완전히 잃었지만, 바깥쪽 시야는 일부 볼 수 있는 주변 시력은 유지하고 있다. 팔랑커 교수는 "망막의 주변 시력은 그대로 가시광선을 감지해 유지하고 중심 시력은 적외선으로 회복하는 것"이라며 "인공 시력과 남은 주변 시력을 통합해 시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터리 필요 없어 상용화 가능성 커
이전에도 망막에 전자 칩을 이식해 시력을 회복하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전력은 외부에서 받아 전선을 연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리마의 전자 칩은 빛을 받아 전류를 만들어 무선으로 작동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그만큼 사용하기 편리해 상용화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앞으로 전자 눈의 해상도를 더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현재 망막에 이식한 칩 해상도는 378픽셀(화소)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영상의 가로세로 화소가 각각 378개라는 의미다. 연구진은 픽셀 폭을 100㎛에서 20㎛로 줄여 칩당 1만개 픽셀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팔랑커 교수는 "20㎛ 픽셀 칩은 환자에게 20/80(한국식 0.25) 시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안경 카메라의 확대 기능을 이용하면 20/20에 가까운 정상 시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2025), DOI: https://doi.org/10.1056/NEJMoa2501396
Ophthalmology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016/j.xops.2024.100510
Nature Photonics(2012), DOI: https://doi.org/10.1038/nphoton.2012.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