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9일 구글의 양자컴퓨터 연구 조직인 ‘퀀텀 AI’가 새로운 양자 컴퓨터인 ‘윌로(Willow)’를 깜짝 공개했다. 윌로는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로 10셉틸리언(10의 24제곱·septillion)년이 걸리던 문제를 단 5분 만에 풀 수 있는 놀라운 성능을 보였다. 10셉틸리언년은 우주의 역사보다도 긴 시간이다.
윌로는 동시에 양자컴퓨터 상용화의 가장 큰 걸림돌인 양자 오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퀀텀 AI 설립자인 하트무트 네벤(Hartmut Neven)은 “윌로 칩은 양자컴퓨팅에서 오류 수정과 성능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줬다”며 “대규모 양자 컴퓨터 구축을 위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윌로가 공개되고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 주가는 5% 넘게 올랐다. 동시에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 가격은 일제히 급락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가상화폐에 호의적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주가 중용되면서 한동안 천정부지로 오르던 비트코인 가격이 윌로의 등장에 주춤했던 것이다.
구글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양자컴퓨터를 선보였으니 알파벳 주가가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 가격은 왜 급락한 걸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비트코인 랠리가 예상치 못한 양자컴퓨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는 블록체인에 기반한 보안 체계를 갖추고 있다. 블록체인은 정보를 하나의 중앙 서버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의 네트워크에 분산하고 공유하는 방식의 시스템이다. 해킹이나 위·변조를 하려면 전 세계 곳곳에 흩어진 모든 참여자의 네트워크를 동시에 공격해야 하는데, 이를 해낼 수 있는 컴퓨터 기술은 없다. 블록체인이 뚫리지 않는 방패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양자컴퓨터는 블록체인의 보안 성능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오류 정정 등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언젠가는 블록체인의 보안 기술을 무력화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는 양자컴퓨터를 이용한 해킹이 현실화되면 3조달러(약 4399조5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아서 허먼 허드슨연구소 연구원은 “누군가 양자컴퓨터에 대한 해킹 개발 능력을 갖추고 가상화폐에 사용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폭발을 기다리는 시한폭탄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자컴퓨터 전문가들은 이런 위협이 당장 현실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구글 역시 윌로 공개 이후 이런 논란이 번지자 “가상화폐에 쓰이는 암호 시스템을 깨려면 빨라야 10년은 걸릴 것”이라며 “실제 해킹을 위해서는 400만개의 큐비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양자컴퓨터는 0과 1이 중첩된 큐비트를 연산 단위로 이용하는데, 큐비트가 많을 수록 성능이 좋다는 의미다. 구글의 이전 양자컴퓨터인 시커모어는 67개의 큐비트를 갖추고 있고, 이번에 공개된 윌로우 역시 105개에 불과하다. 큐비트가 늘어날수록 연산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확률도 늘어나기 때문에 105개의 큐비트를 400만개까지 언제쯤 늘릴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상욱 한국양자정보학회 회장(KIST 책임연구원)도 “양자컴퓨터를 이용해서 블록체인 같은 현존하는 보안 기술을 해체하는 건 기술적으로 아직 한참 남은 이야기”라며 “비트코인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이 반영돼서 가격이 움직인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가상화폐인 아발란체의 창설자인 에민 귄 시러도 WSJ와의 인터뷰에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대재앙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시점은 충분히 멀리 있는 만큼 공포를 느낄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 당장 양자컴퓨터의 발전 속도가 현존하는 보안 체계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지만, 양자 시대에 대비한 준비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10년이나 15년 뒤의 어느 시점에는 양자컴퓨터가 지금의 보안 체계를 넘어설텐데, 그에 대비해 새로운 보안 체계를 갖추는 데에는 이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상욱 회장은 “양자컴퓨터에 대응하는 암호 체계를 준비하고 트랜지션하는 데에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20~30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며 “양자컴퓨터가 지금 당장 블록체인을 위협할 만큼 기술적으로 앞선 것은 아니지만, 블록체인보다 뒤떨어지는 암호 체계들은 지금 당장 양자컴퓨터 시대에 대응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국가표준기술원(NIST)은 양자컴퓨터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양자 안전 알고리즘 표준을 마련했고, 민간 차원에서도 양자 내성 암호체계를 갖추는 노력을 하고 있다.
양자컴퓨터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을 가능성도 크다. 구글과 IBM을 중심으로 양자컴퓨터 개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막대한 자금이 양자컴퓨터 연구개발(R&D)에 투입되고 있다. 국내 한 양자컴퓨터 연구자는 “구글이 시커모어를 출시한 2019년에만 해도 윌로 수준의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려면 1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봤지만, 구글은 5년 만에 윌로를 내놨다”며 “양자컴퓨터 발전 속도에 가속도가 붙고 있어 5년, 10년 같은 예측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구글은 이미 윌로 다음을 겨냥하고 있다. 구글의 다음 목표는 ‘유용하고 기존 컴퓨터를 뛰어넘는’ 계산을 양자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이다. 윌로는 슈퍼컴퓨터보다 압도적인 계산 능력을 보여줬지만, 이는 RCS 벤치마크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측정한 것이다.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아직까지 기존 컴퓨터와 비슷한 수준의 성능을 보인다. 하트무트 네벤 퀀텀AI 리드는 “실제 응용 문제에서 기존 컴퓨터로는 불가능한 영역의 알고리즘을 개발해 실제적이고 상업적으로 유용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음 목표”라며 “신약 개발, 고효율 배터리 설계, 핵융합 에너지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자컴퓨팅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양자컴퓨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의 양자컴퓨터 기술 수준은 2.3점에 불과하다. 정부는 지난해 퀀텀 이니셔티브를 발표하고 1000큐비트급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고, 2035년까지 양자 인력 3500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양자 관련 예산을 올해 2000억원으로 확대하는 등 투자를 늘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등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양자컴퓨터의 핵심인 양자 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 양자 센서 등을 개발하고 있다. 노르마 등 양자컴퓨터 개발에 뛰어든 기업도 있다. 노르마는 작년 말 사우디아라비아에 1800만달러 규모의 양자컴퓨터 수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정현철 노르마 대표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양자컴퓨터 개발 초기에는 초전도 물질이 가장 중요했으나, 양자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지려면 반도체 기술을 통한 최적화가 필요하다”며 “관련 산업에서 인프라를 잘 갖춘 한국과 미국, 대만이 앞으로도 양자컴퓨터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