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납치 여성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엉뚱한 곳을 수색하는 사이 피해자가 13시간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피해자는 갇힌 상태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경찰은 상당 시간동안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원춘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은 경찰의 초동 수사와 대응을 둘러싼 논란을 불렀다. 2022년 전국에 도입한 ‘보이는112′는 이 아픈 경험과 반성에서 탄생했다. 신고자가 경찰관의 물음에 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휴대전화를 두 번 두드리는 등 신호를 하면 경찰이 보낸 접속링크를 통해 112센터와 순찰차에 신고자 위치와 함께 휴대전화 카메라가 포착한 현장 화면이 전달된다.
보이는112는 현장에 보급된 이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가정 폭력 피해자를 구했고 7월에는 오토바이를 훔친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최귀원 과학치안진흥센터(KIPoT) 소장은 “보이는112는 실제 일선 현장의 목소리와 과학기술을 결합해 범죄 예방 효과를 보고 있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고 말했다.
과학치안진흥센터는 지난 2021년 1월 경찰 업무의 과학화와 치안현장 맞춤형 연구개발(R&D) 관리, 치안 산업의 확대를 목표로 설립됐다.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치안 분야의 연구사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현장 경찰의 요구와 첨단과학기술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지난해엔 경찰청의 R&D사업을 주관 관리하는 전문관리기관으로 지정됐다.
미국과 중국, 영국, 일본에서는 경찰 산하에 전문기관을 설립해 범죄 퇴치와 예방에 필요한 각종 기술과 과학지식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은 과학기술을 치안 현장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드론과 얼굴과 생체인식, 총격 감지 등 다양한 기술이 현장에 도입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범죄예측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참여기업도 다양하다. 포드와 닷지 같은 자동차 회사부터 유전자 분석 기업, 전자단말기 기업, 빅데이터 기업까지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국내에선 센터가 설립되기 전에도 범죄 현장에서 유전자 감식을 비롯해 다양한 과학기술이 활용돼 왔다. 하지만 대부분 장비와 기술을 해외에서 사왔다. 현장에선 한국 환경에 맞는 기술과 장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왔다.
센터는 현장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국내 과학자와 기업들의 기술을 적극 발굴하고 있다. ‘폴리스랩’ 사업은 경찰과 과학자가 힘을 합쳐 치안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맞춤형R&D 사업이다. ‘보이는112′를 비롯해 기존 방패보다 40% 가벼운 접이식 방검방패는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현장에서 즉시 조회가 가능한 모바일 지문인식 시스템과 조성폭력 피해자와 상담하는 인공지능(AI) 챗봇, 겹친 지문을 식별하는 기술도 폴리스랩 사업을 통해 개발됐다. 경찰의 미래에 활용될 원천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경찰 장비에 쓰일 더 가볍고 강한 소재와 다크웹에서 증거물을 수집하고 추적하는 원천기술이 머지 않아 확보될 것으로 보인다.
최 소장은 “첨단 과학기술이 일선 현장에 도입되면 사회를 더 안전하게 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인지 과학치안 R&D를 보는 국민의 기대감은 매우 높다”고 말했다. 경찰의 R&D 과제는 계속 늘고 있다. 경찰청은 미래치안정책국 주도로 연간 600억원의 예산을 내년에는 733억원 수준으로 더 늘렸다. 경찰과 연구자, 기업들의 사업에 대한 참여도와 만족도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의공학 분야 전문가인 최 소장은 KIST의공학연구소장과 유럽연구소장을 지낸 R&D 행정가이다. 최 소장을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으로 자리를 옮긴 과학치안진흥센터에서 만났다. 백동수 총괄본부장과 강태호 사업기획팀장이 도움말을 줬다.
-센터는 어떻게 설립됐나.
“경찰은 오랫 동안 과학기술을 업무에 사용해왔다. 범죄현장에서 증거물 수집에 사용하는 포렌식 기술은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센터가 생기기 전까지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이나 장비들은 대부분 수입에 수입에 의존하고 예산도 일반 사업 예산으로 충당했다. 그러던 중 법과학에 관심이 많던 권동일 서울대 교수와 이우일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전 서울대 공대 학장) 등 전문가들이 경찰도 이제는 R&D를 해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으면서 분위기가 형성됐다. 경찰 내에서도 미래치안 기술 확보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2015년 경찰법을 개정하면서 당시 2개 과제에 각각 11억원씩을 배정해 첫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처음엔 서울대에서 사업을 관리하다가 2018년 경찰청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 손잡고 치안현장 맞춤형 R&D사업인 폴리스랩1.0을 하면서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사업이 계속 생겨나면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사업단이 생겼다. 경찰청과 과기부는 인사교류를 했는데 사업단 형태로 할 게 아니라 ‘과학치안’이라는 특성을 잘 살리면 산업에서도 ‘블루오션’일 것 같아서 2021년 1월 재단법인을 만들게 됐다.”
-경찰이 최근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R&D 분야는 무엇인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마약과 딥페이크 분야이다. 워낙 사회적 문제로 심각해서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다. 뉴 턴의 점성법칙, 응력과 무관한 즉 일정한 점도를 따르지 않는 유체인 비뉴턴 유체를 활용해 총기 대신 범인 제압에 사용하는 방안도 관심사이다. 한국은 총기 사고가 나지는 않지만 흉기를 이용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칼이 잘 안들어가고 사람을 잘 보호하고 기동성이 좋은 소재를 발굴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인파를 관리하고 위험을 예측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아마 지금도 현장에 나가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기반 군중 밀집관리기술 개발 사업으로 불리는 이 사업은 폐쇄회로(CC)TV와 교통카드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어디로 많이 모이는지 알아내고 취약지역을 찾아 경찰을 어디에 배치할지까지 제시하는 알고리즘을 확보하는 게 목표다.”
-현장 목소리를 통해 발굴된 대표적 성과 하나를 꼽는다면.
“2022년부터 보급된 ‘눈에 보이는 112′를 꼽고 싶다. 예전엔 112로 신고하면 ‘여기 지금 사건 났습니다’ ‘어디세요?’ ‘여기 어디입니다’이러고 끝났다. 현장을 못보니 정말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자칫 사소한 일로 오인하기도 한다. 이전에도 보험사에서는 사고가 나면 영상을 켜는 서비스가 있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누가 앱을 깔고 켜서 쓰겠나. 가급적 신고하면 바로 상황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동의만 하면 인터넷주소 링크(URL)를 보내주고 클릭만 하면 자동으로 카메라가 켜지는 방식으로 현장 상황을 보여주자는 아이디어에서 보이는112가 나왔다.”
-현장에서는 다양한 상황이 벌어진다. 어떻게 아이디어를 발굴하나.
“연구자의 의견도 받고 국민이 참여하는 아이디어 공모전이나 수요 조사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장 의견이 중요하다. 폴리스랩1.0 사업을 하면서 현장 경찰관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서울 신림동에서 흉악범이 휘두른 칼에 출동한 경찰 중 한 명이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경찰 3~4명이 삼단봉만 든 채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새 방패를 만들겠다고 하자 처음엔 수사관들의 반응이 좋지는 않았다. 펜대나 굴리는 사람들이 뭐하겠냐는 눈빛이었다. 일촉즉발 상황에서 큰 방패를 들고 어떻게 뛰며 비좁은 차 어디에 두겠냐는 말이 나왔다. 이미 출동할 때 장비가 20㎏이 넘는데 또 몇 ㎏나 나가는 방패를 든다는 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는 의견도 나왔다. 마침 회의실 탁자에 올려놓은 작은 다과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꽤 작고 가벼운 스티로폼 재질이었다. 버튼만 누르면 크게 펴지는 접이식 방검방패는 그렇게 탄생했다. 경찰들도 그런 방식이라면 현장에서 츙뷴히 쓸 수 있겠다고 동의했다. 센터는 폴리스랩운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현장 경험이 잘 전달되도록 연구자 한 명당 경험이 풍부한 현장 경찰 한 명씩 매칭을 해놨다.”
-경찰과 일반 연구기관의 R&D는 무엇이 다른가.
“일반 연구기관의 R&D는 선정 평가를 하고 나중에 연구 결과가 목표에 부합했는지 평가한다. 반면 경찰은 사업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도록 꼼꼼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와 기업 입장에선 너무 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관리가 엄격하다. 재난안전을 책임지는 부처의 특성상 현장에서 문제 없이 사용되려면 개발 단계부터 품을 많이 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실증 과정에서 분명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폴리스랩1.0을 기획할 때부터 그렇게 기획했다. 실증에 참여할 지역 경찰관서를 찾는 일부터 현장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 최적의 장소를 찾아 효과적인 실증 방식을 찾는 것까지 연구자들의 몫이다. 웬만한 연구기관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관리한다.”
-같은 문제를 두고도 경찰과 과학자 간에 시각차가 있을 것 같다.
“요즘 마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구자들도 신종 마약을 빨리 탐지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싶어 한다. 연구자들은 가급적 가장 최근 유행하는 마약을 확보해 연구하고 싶지만 경찰 도움 없이는 연구용 목적이라도 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경찰청 입장에서는 연구 목적이라도 마약성 물질을 넘겨주기 쉽지 않다. 인공지능(AI)과 CCTV를 활용한 연구에서도 연구자들은 가급적 많은 데이터와 영상을 확보하길 원한다. 반면 경찰은 개인 정보를 함부로 공개하기를 꺼려 한다. 수사관들은 연역적 추론이나 귀납적 추론을 하는 AI와는 다른 가설적 추론을 한다. 주어진 정보가 아니라 현장에서 얻은 단서를 토대로 다양한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강화하거나 지우는 방식으로 답을 얻는 식이다. 연구자의 요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연구자들은 데이터를 얻지 못하다보니 서로 답답해 하는 일이 많다.
R&D에 대한 태도에도 차이가 드러난다. 경찰은 지금 당장 국과수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냐고 물어보면 연구자들은 글쎄요라고 말한다.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콘셉트는 분명하지만 실행 단계를 물어보면 말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마약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근원적인 방법을 찾고 있는데 과학자들은 뇌의 생물학적으로 초음파 자극을 주든가 약물을 주는 방식으로 중독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언제쯤 가능한지 물어보면 연구자들은 잘 대답을 못한다. 동물실험 정도는 증명이 됐지만 언제 가능한지는 확답을 못한다. 센터는 경찰과 연구자 입장을 서로에게 전해서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R&D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기관과 기업이 참여했나.
“출연연구기관 중에선 KIST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매우 활동적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TRI는 인공지능 분야와 드론 분야에서 기술 발굴에 나서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도 전국 곳곳에 분원을 두고 있는데 생활 밀착형 기술이 많고 대부분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관심이 많다.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도 치안과학 제품 인증 표준 업무를 많이 수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100개 기업과 기관, 대학에서 참여했다.”
-치안 연구는 왜 과학자에게 매력적인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는 기술도 있지만 도전적이며 한정된 분야에만 사용되는 연구들이 있다. 예를 들어 ‘법(法)보행’이란 영역이 그렇다. 지문이나 망막처럼 사람마다 다른 걸음걸이가 있다. 법보행은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고 사람을 특정하는 기술이다. 얼굴을 볼 수 없을 때처럼 제약이 있을 때 사람을 찾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할리우드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기술처럼 보이지만 이미 활용되고 있다. 처음엔 바이오 연구에서 시작했지만 경찰이 봤을 때는 사람을 특정하고 질병 병력까지 추측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다. 연구자도 몰랐던 새로운 응용 영역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과학치안 R&D는 하나의 통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연구한 기술이 국민 안전에 기여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도 과학자에겐 꽤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연구자들이 실제 현장 실증을 나가보면 뿌듯해 한다. 현장 경찰서에 가면 서장을 비롯해 경찰 관계자들이 들어오고 함께 고민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실증할지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 그런 것들을 해보면 연구자들도 뭔가 좀 일다운 일을 한다는 말을 한다.”
-현장 경찰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한가. 보상은 없나.
“현장 경찰의 자문은 필수이다. 본청에서 기획을 하는 경찰관들도 중요하지만 계급에 상관없이 현장 경험이 풍부한 경찰관의 참여가 중요하다. 일선 경찰서에도 R&D에 관심이 많고 의견을 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R&D를 하지 않고 업무가 많은 조직이다 보니 자문을 하러 가는 일을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경찰관도 있다. 그래도 여러 성과가 인정을 받으면서 처음보다 분위기는 많이 좋아졌다.
다만 연구비를 쓰다보니 사업에 자문을 해주고 실증에 참여한 현장 경찰관들에게 보상할 길이 없어 아쉽다. ETRI가 위치 추적 시계를 개발했을 때 현장의 6개 관서에 나눠주고 누가 먼저 찾는지 경연 대회를 열었다. 정말 팀으로 나눠 열심히 찾았다. 결국 상금을 주지는 못하고 1등을 한 팀에게 통닭 100마리, 2등 팀에겐 50마리를 상품으로 줬다.”
-해외에선 치안 분야의 연구와 산업화가 활발한가.
“미국은 치안 현장에서 과학기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입하는 나라로 손꼽힌다. 미국은 법무부 산하에 미국립사법연구원(NIJ)이 있어서 법의학과 법과학 분야의 R&D사업을 수행하고 수사기관 장비의 표준 인증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NIJ는 시장성과 경제성이 떨어져 미국 기업도 회피하는 치안 과학기술과 장비를 개발하고 응용기술 개발에 투자를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성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런 기관들이 있다. 영국은 국방과학기술연구소(DSTL)가 기초과학과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를 활용해 범죄퇴치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일본은 과학경찰연구소, 중국은 공안부연구소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국내 치안 R&D와 산업 생태계는 어떤가.
“한국은 아직 해외처럼 전문연구기관과 체계적인 품질 평가 기준이 없는 실정이다. 이제 하나씩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당장 경찰에 새 소재로 만든 방패를 개발해 공급하려고 해도 품질을 검증할 체계가 없다. 결국 미국 NIJ의 기준을 가져와서 그 기준을 충족하는지 살펴보는 수준이다. 치안 산업이란 말도 아직 낯설다. 입법을 하는 국회의원들도 잘 모른다. 치안 산업이 산업 분류나 기술 분류 체계에 아직 없기 때문이다. 치안 산업은 방위 산업이나 보안 산업처럼 다른 산업과 중복된 부분도 있어서 어디까지 재난산업으로 분류해야 할 지 어려움이 있었다. 치안과학을 하는 기업의 범위는 매우 넓다. 대테러 분야는 방산 기업들이 하고 디지털포렌식 같은 분야는 정보기술(IT)과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하고 있다. 최근에야 기술 분류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헷갈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기업들은 어느 정도 적극적인가.
“분야마다 다르다. 폐쇄회로(CC)TV 보안 쪽은 시장이 크다 보니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반면 방패 같은 분야는 국내 시장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기업들이 잘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고 시범 생산을 하려면 직접 가서 일일이 부탁을 해야 한다. 물론 국내에는 아크릴을 다루는 기업들이 많아서 그런 곳에 의뢰해 만들어도 된다. 하지만 칼 들고 난동을 부리는 범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려면 충격에 강하고 충분히 가벼운 탄소복합소재를 써야 하는데 이를 방패로 만들려고 했을 때 잘 나서지 않는다.”
-국민 세금으로 수행한 R&D가 자칫 시민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시각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경찰이 상대하는 대상은 범인이기도 하지만 국민이기도 하다. 경찰의 새 장비와 신기술을 발굴하는 R&D에서도 그런 부분을 고려한다. 예를 들어 국민권익위원회에선 새 방패가 경찰을 보호하지만 자칫 시민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방패 주변에 고무패킹을 넣어서 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약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런 것들을 보완한 뒤에야 경찰이 구매하도록 하고 있다.”
-해외와 어떤 협력을 하고 있나.
“센터는 유럽의 혁신 개방형 연구 사업인 호라이즌2020에 참여하고 있는데 특히 독일과 협력이 활발하다. 독일 경찰도 자체적으로 R&D를 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독일과 공동 연구사업을 하게 됐다. 독일은 한국보다 디지털 전환이 빠르지 않다보니 한국에서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지금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지원을 받아 뒤셀도르프에 협력 센터를 만들었다. 독일과는 딥페이크와 움직이는 지구대 등 과제 2개를 함께 하고 있다. 딥페이크는 초국적 범죄이고 사이버 범죄의 경우 해외 데이터를 얻을 길이 없다. 특히 서양인 정보는 얻기가 어려운데 독일과 협력을 통해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 움직이는 지구대 연구도 함께 하고 있다. 한국은 점점 인구가 줄면서 순찰차에 지구대의 민원처리 기능을 넣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독일도 꽤 관심이 높은 사업이다.
이와 별도로 비정형 데이터 연구를 하고 있다. 범죄 현장에서 수집된 비정형 데이터를 학습한 AI를 수사에 적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이다. 독일은 자국 내에서 외에도 한국에선 다른 문화권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범용성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독일도 과학치안 R&D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도 수요가 적다보니 기업에서 경찰만을 위한 특정한 기술개발을 잘 안해준다고 한다. 양국간 교류는 공동 연구도 있지만 수요를 함께 늘리고 시장을 키워 나가는 목적도 있다. 싱가포르와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 내무부 산하에는 홈팀과학기술원(HTX)이라는 큰 연구기관이 있다. 과학기술과 국방, 재난연구를 하는 부서들이 통합된 연구소인데 내년도 수교 50주년을 맞아 이곳과 협력도 추진하려고 한다.”
-경찰이 필요한 기술을 빠르게 보급하고 기업들도 육성할 전략이 있나.
“연구 가속화(액셀러레이션)는 우리 센터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경찰청 R&D가 내년부터 733억원이라고 하는데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보면 원래는 3000억~6000억원 정도 지출해야 선진국 수준을 맞춘다. 폴리스랩3.0은 기업들이 기존에 보유한 기술을 활용해 현장에 빠르게 보급하는 사업이다. 기업과 연구자가 만든 제품을 혁신도전제품 사업에 연계하거나 혁신제품 인증을 해줘서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조달청 과제에 연결해서 연간 10억원씩 시제품을 만드는 사업도 하고 있다.”
-단순한 R&D를 넘어 치안 산업을 육성하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새로운 방패를 만들고 드론 기술을 확보하느라 예산을 투입했지만 아직까지 생태계 전반을 넓히지는 못하고 있다. 이를 해결할 치안산업진흥법의 입법을 추진했지만 아직까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법령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업들이 목소리를 내는 구조도 있어야 할 것 같다. 한국의 대표 산업인 반도체, 조선, 자동차, 전자 분야를 보면 기업들의 모임이 있다. 기업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정부와 사회에 목소리를 내왔다. 치안과학 분야에도 기업들의 구심점이 필요하고 산업화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과학치안 연구를 하는 기존 기업들 외에도 네이버나 다음, 카카오 같은 대형 인터넷서비스 기업들처럼 다양한 기업들을 더 포괄해야 한다.”
-치안 산업은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실 국내만 보면 경찰 예산은 연간 12조원 정도인데 10조원은 인건비, 2조원은 장비 운영비에 쓰인다. 대부분 운영비에 들어가지 새로운 과학장비를 살 예산이 거의 없다. 기업들도 납품을 해봐야 수지타산이 안맞는다. 결과적으로 우리 시장만으로는 어렵고 해외 시장을 향해 가야 한다. 해외에선 한국의 경찰 장비와 기술에 관심이 많다. KIST 전북분원에서 개발한 탄소소재는 독일에서도 관심이 높다. 요즘 K팝, K푸드처럼 ‘K치안’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사용된다. K방산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의 방위산업계로 연결됐고 결과적으로 방산 제품이 많이 팔리게 된 것이다. 한국은 치안 분야의 기초가 되는 과학기술이 많이 발전한 나라가 됐고 해외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경찰청도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다.”
☞최귀원 소장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바이오엔지니어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헨리포드병원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고 지난 1993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일하고 있다. KIST 의공학연구소장과 유럽연구소장을 지냈고 2021년부터 초대 과학치안진흥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한생체역학회 회장과 대통령자문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의료기기산업 전문위원회 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제도혁신기획단 위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