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가 한국과 국방 기술 혁신을 위한 연구개발(R&D) 협력에 나선다. 핀란드는 세 차례에 걸쳐 한국산 자주포인 K9을 96문 구매했을 정도로 국방 분야에서 한국과 우호 관계에 있다. 앞으로는 한국이 만든 무기를 사는 수준에서 나아가서 안보에 필요한 기술을 함께 개발하고 공유하는 협력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전망이다.

안띠 핵캐넨(Antti Häkkänen) 핀란드 국방부 장관은 지난 9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방산 제품이 무엇이 있는지 다시 한번 평가하고 있다”며 “국방 관련 제품은 빠르게 만들기 어려운데 한국은 고품질의 제품을 빠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말했다. 그는 “국방 R&D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핵캐넨 장관은 주한 핀란드대사관이 올해 처음 개최한 ‘한-핀란드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번 포럼은 ‘떠오르는 민·군 겸용 기술’을 주제로 한국과 핀란드의 국방 R&D 협력을 위해 마련됐다. 한국과 핀란드가 갖춘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협력해 국방 기술의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이다.

안띠 핵캐넨 핀란드 국방부 장관이 지난 9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열린 '한-핀란드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해 기자들과 만나 "한국 방산 제품의 가장 큰 강점은 '속도전'"이라며 "한국은 고품질의 제품을 빠르게 납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이병철 기자

핵캐넨 장관은 “전 세계 안보 환경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북한과 중국이 러시아를 지원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어가는 데 대해 민주 국가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북유럽에서 손꼽히는 정보기술(IT) 강국이다. 핀란드의 이동통신 기업 노키아는 한때 세계 1위의 휴대폰 판매 기업이었다. 노키아는 현재도 디지털 정보 전송, 무선 통신 네트워크, 디지털 데이터 처리 분야에서 중요한 특허를 보유한 ‘특허 공룡’으로 업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핀란드는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AI 기술력은 유럽 내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자국어 기반 대형언어모델(LLM)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선보였다. 포로(poro)라고 이름 붙은 이 모델은 미국 오픈AI의 GPT-3.5와 유사한 수준의 성능으로 알려져 있다. GPT-3.5는 오픈AI가 지난해 GPT-3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해 공개한 AI이다. 핀란드는 인공위성, 양자기술, 선박 분야에도 강점을 갖고 있다.

핵캐넨 장관은 “한국과 핀란드는 모두 정보화 사회에서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양국은 급변하는 전쟁 환경에서 필요한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핀란드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국방 기술이 안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중요 기술을 공동 개발하려면 신뢰가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핵캐넨 장관은 “핀란드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과 국방 기술을 개발해 공유했던 선례가 있다”면서 “한국과도 신뢰와 계약을 바탕으로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핀란드와 국방 R&D 분야 협력에 나선다면 EU의 연구비 지원도 가능할 전망이다. 핵캐넨 장관은 “유럽 내에서는 R&D 협력에 필요한 자금은 자국과 EU에서 지원하고, 결과물은 함께 공유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핀란드 육군이 지난 2022년 K9 자주포 훈련을 하는 모습. 핀란드는 국산 자주포인 K9을 96대 도입했다./로이터 연합뉴스

그는 10년 이내에 국방 기술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핀란드 내부에서 일었던 여성 징병제 논란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핀란드는 인구가 정체 중인 만큼 추후 여성 징병이 필요할 수 있지만, 국방 기술이 발전하면 안보를 위해 필요한 병력 수를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핵캐넨 장관은 “장기적으로는 남녀가 동등한 징병제가 논의될 수 있다”며 “다만 그때가 되면 AI와 같은 신기술 도입으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안보 분야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을 차단하고 러시아인의 망명을 거부한데 이어 러시아인이 핀란드에서 부동산을 살 수 없게 하는 법안도 추진 중이다.

그는 “핀란드 부동산을 소유한 러시아인을 추적하다보니 푸틴이 배후에 있거나 러시아 보안 당국과 연결점이 확인됐다”며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주변 국가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준비를 해온 만큼 유사 상황에서 중요 시설에 대한 사보타주(공작)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국제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특히 금융지원뿐 아니라 실제 전쟁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 지원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핵캐넨 장관은 “독재국가는 민간인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폭력을 사용한다”며 “이들도 서방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민주국가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