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 노벨상을 수여하는 미 하버드대 '있을 법하지 않은 연구 연보'지의 편집자인 마크 에이브러햄스(Marc Abrahams, 오른쪽)가 스탠퍼드대 의대의 박승민 박사와 스마트 변기를 들고 있다./박승민 박사 제공

한인 과학자가 도시에서 나오는 개인의 인체 정보를 가상세계에 모아 건강 관리를 돕는 개념을 제안했다. 스마트 변기처럼 다양한 센서를 부착한 장치와 소셜미디어(SNS) 데이터를 활용한 가상 도시 '디지털미(DigitalMe)를 만들어 의료 서비스에 활용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차원이지만 미래형 도시의 새로운 의료 모델이 될 수 있는 기술이다.

박승민 싱가포르 난양공대(NTU) 회학생명공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지난 23일 국제 학술지 '이노베이션'에 스마트 시티의 새로운 모델로 디지털미를 제안했다. 이번 연구에는 마이클 레펙 스탠퍼드대 교수(스탠퍼드 인천 송도 글로벌캠퍼스 센터장), 김소형 스탠퍼드대 교수, 주경희 박사 연구진이 함께 참여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 미국 하버드대가 발간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연구 연보'에서 주관하는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한인 과학자다. 이그노벨상은 과학계 최고 권위의 상인 노벨상을 패러디해 만들어진 상이다. 웃음을 주면서 동시에 진지한 생각을 할 기회를 준 과학자에게 수여된다. 박 교수는 당시 스마트 변기 연구로 공중보건 분야에서 수상했다.

그는 스마트 변기로 대소변을 분석해 건강 관리를 돕는 개념을 도시 전체로 확장한 디지털미 도시를 제안했다. 변기는 물론 집 내부의 모든 가전이 사물인터넷(IoT)으로 연결된 스마트홈과 도시에서 얻은 데이터를 활용한다는 개념이다. 여기에 소셜미디어(SNS), 온라인 쇼핑 같은 행동 데이터도 모두 통합한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지털 공간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 디지털 트윈 기술로 또 하나의 도시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인이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면, 스마트 침대가 이를 인식하고 자동으로 구조대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 가스나 전기 사용량을 점검해 거주자에게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낼 수 있다. 여기에 소셜미디어처럼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알 수 있는 데이터가 더해지면 효과는 극대화된다.

실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기에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데이터를 분석해 유행 지역과 시기를 알아내기도 했다. 개인의 건강은 물론 도시에서 일어나는 건강 관련된 모든 정보를 모아 처리하면 안전사고와 질병을 예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박승민 싱가포르 난양공대(NTU)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이 디지털트윈을 도시에 적용한 '디지털미(DigitalMe)' 개념을 제시했다. 변기를 비롯한 스마트센서에서 얻은 데이터로 디지털 공간에 가상의 도시를 만들고 주민들의 건강 관리를 돕는다는 개념이다./픽사베이

박 교수는 "'미래 스마트 도시에서 우리의 건강은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제안한 개념"이라며 "개인의 건강 정보를 디지털로 복제해 질병을 예방하고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미 도시는 디지털 트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이 공장에서 제품 품질과 공정 관리를 위해 개발한 기술이다. 공장을 가상세계에 3차원(D)으로 구현하고 문제가 생긴 곳이 있는지, 해결책은 무엇인지 알아내고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박 교수는 디지털 트윈을 도시에 적용한다면 가상 도시를 시뮬레이션(가상 실험)해 주민들의 건강 관리와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디지털 트윈은 장비의 관리에는 아주 효과적이지만, 아직 사람에 대한 적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디지털미 도시가 구현된다면 '반응형 의료'를 넘어선 '정밀 의료' 구현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반응형 의료는 환자가 직접 병원을 찾으면 이에 반응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반면 정밀 의료는 실생활 속에 쌓인 데이터를 이용해 환자가 병원을 찾기 전에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질병을 예방한다는 개념이다. 박 교수는 "디지털미는 의료와 도시 계획의 혁신적인 융합을 의미한다"며 "앞으로 많은 연구와 시범사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디지털미에 근접한 도시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 스페인의 마드리드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다. 한국에서도 세계 최초로 스마트시티 국제 인증을 받은 세종시, 부산의 에코델타시티 계획이 있다. 박 교수 연구진은 2020년 에코델타시티 사업단 선정 과정에서 한화에너지 컨소시엄에 참여해 스마트 변기 기술을 적용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다만 디지털미 도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정보 보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정보 보호를 강화할 수 있는 암호화 기술,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AI) 같은 기술과 결합하고 장기 연구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 스탠퍼드대 의대의 박승민 박사가 대학 구내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앞에서 변기에 앉아있다. 그는 대소변 상태를 파악해 질병을 진단하는 스마트 변기를 개발한 공로로 지난해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이그 노벨상의 마스코트가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것이어서 이런 모습을 연출했다./미 스탠퍼드대

박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에서 응용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물리학자다. 미세유체를 전공하면서 의학과 건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의료현장에는 임신진단키트나 코로나진단키트처럼 미세유체를 이용한 기기가 많다.

그는 지난 2020년 '네이처 바이오메디컬 엔지니어링'에 진단용 스마트 변기를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스마트 변기가 내장 카메라로 대소변 사진을 찍어 10여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2022년에는 스마트 변기로 무증상 감염자를 통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는 논문을 네이처 출판그룹 학술지에 발표했다.

참고 자료

Innovation(2024), DOI: https://doi.org/10.1016/j.xinn.2024.100678

NPJ Digital Medicine(2022), DOI: https://doi.org/10.1038/s41746-022-00582-0

Nature Biomedical Engineering(2020) DOI: https://doi.org/10.1038/s41551-020-05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