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사 머크(MSD)는 2000년대부터 지구 저궤도에 떠 있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의학 실험을 시작했다. 단백질 결정은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미세중력 환경에서 더 균일하게 성장한다. 머크는 우주에서 의학 실험을 진행하며 지구에서도 비슷하게 결정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약품이 연 매출 250억달러(35조원)를 기록하는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이다.

멀어 보이기만 했던 우주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무대로 변하고 있다. 우주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줄 의약품을 실험하는 공간이 됐다. 한국 과학자도 이 변화를 포착하고 우주의학 시장에 뛰어들었다. 2021년 윤학순 대표는 우주의학 실험 시설을 개발하는 스페이스린텍을 창업했다. 윤 대표는 미국 노퍽 주립대 공학과 정교수이자 하버드 의대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스페이스린텍은 드롭 타워를 이용해 지상에서 미세중력 환경을 구현한다. 드롭 타워는 높은 곳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면 순간적으로 물체 내부에 미세중력 환경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활용한 시설이다. 이 회사는 국내 유일의 철광회사인 SM한덕철광산업이 강원도 정선에 갖고 있는 수직 갱도에 600m 높이 드롭 타워를 건설했다.

수직 갱도는 광산에서 광석이나 자재를 나르거나 사람이 오가기 위해 수직으로 뚫어 놓은 길이다. 회사는 이번 달 30일 폐광되는 강원 태백시의 수직 갱도도 드롭 타워로 쓸 예정이다. 이 갱도는 길이가 900m에 달해 미세중력을 10초 정도 구현할 수 있다. 지상에서 미세중력을 10초 이상 구현하는 시설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윤 대표는 말했다.

지상에서 미세중력 실험 경험을 쌓은 스페이스린텍은 본격적으로 우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 발사체 업체인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는 이번 달 말 시험 발사체를 우주정거장보다 낮은 준궤도로 쏘아 올릴 계획이다. 스페이스린텍은 이 발사체에 우주의학 실험 장치를 탑재하기로 했다. 윤 대표는 지난 11일 서울 중구 조선비즈 사무실에서 우주에서 발전할 제약산업의 미래를 설명했다.

윤학순 스페이스린텍 대표가 지난 11일 서울 중구 조선비즈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윤 대표는 "우주 기술이 제약 분야에서 혁신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송복규 기자

–학부 때는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우주의학 기업을 창업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 과정을 하면서 반도체에서 뇌 공학 분야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 교직에 있으면서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과 연구과제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사와 함께 일을 하면서 산업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우주의학이다.”

–우주와 의학이 같은 산업군이 된다는 게 아직 생소하다.

“우주가 의학에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의 암 정복 프로젝트인 ‘캔서 문샷(Cancer Moonshot)’이다. 지난 3월 미국 보건복지부와 미 국립보건원(NIH) 관계자들과 빌 넬슨 나사 국장이 모여 캔서 문샷 참여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은 이미 우주 기술이 제약 분야에서 혁신을 만들 것이라고 보는 거다.”

–강원 태백시에 새로운 드롭 타워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실험 장비 발주는 이미 마쳤다. 오는 12월까지는 장비 설치는 끝날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6월 정도에는 연구자들이 쓸 수 있는 준비가 될 것 같다. 우주의학 분야가 새롭게 시작되는 만큼 미래산업에 필요한 중요 시설이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우주항공청 관계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신경 써주면 잘 풀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페이스린텍이 개발한 우주의학 실험 플랫폼 'BEE-1000'. 이번 달 말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시험 발사체에 실려 준궤도로 간다./스페이스린텍

우주의학 시장은 여전히 작지만, 성장 가능성이 크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보고서에 따르면 우주의학 시장 규모는 지난해 7억7000만달러(한화 1조원)로, 연평균 11% 성장해 2030년에는 16억달러(2조 2000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우주에서 실험한 의약품이 키트루다처럼 지구에서 진가를 발휘했을 때 가치가 더 높아진다.

윤 대표의 궁극적인 꿈도 항암제 개발이다. 단백질 구조 기반의 신약 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다. 스페이스린텍의 인적 구성도 의학에만 쏠리지 않고, 우주의학 실험 위성에 필요한 인공지능(AI), 로봇공학 전문가들도 영입할 계획이다. 우주에서 성장하는 단백질 결정을 컴퓨터로 분석해야 하는 만큼 다양한 기술의 융합이 필수적이다.

–이달 말 발사체로 본격적인 우주의학 실험에 나선다.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가 제주 해상에서 쏘는 시험 발사체에서 코로나19 치료제와 관련된 단백질 ‘3CL 프로테아제’를 실험할 예정이다. 큐브샛 수준의 플랫폼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게 이번 발사의 목표다. 이번 발사 외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함께 항암제를 개발할 계획이다. KIST와는 코로나19 치료제 개발도 하고 있다. 폐암 관련 물질을 우주정거장, 더 나아가 고도 1000㎞ 무중력 환경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중력 저항이 낮은 고도로 우주의학 실험 장치를 수송하는 건 국내 우주기업 인터그래비티 테크놀로지스와 협력하고 있다.”

스페이스린텍이 개발할 우주의학 플랫폼 상상도./스페이스린텍

–스페이스린텍의 수익화 전략이 궁금하다.

“신약 개발은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을 다 받기까지 시간이 길다. 스페이스린텍이 구조 기반 신약에 집중한 이유는 단백질 결정 분석 서비스는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제약사가 원하는 결정을 키워주는 방식으로 충분히 수익화가 가능하다. 단백질 결정 분석 서비스로 연구개발(R&D)에 필요한 수익을 내고 신약 개발로 도약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

–최근 우주항공청이 출범했다. 바라는 점이 있나.

“앞으로 제약산업이 새로운 돌파구를 뚫기 위해선 중력 환경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에서는 중력이 있어 단백질 의약품 결정 성장에 한계가 있는데, 중력 환경이 없으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우주청 관계자분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우주에서 무엇인가 제조한다고 할 때 같은 질량이라면 어떤 것이 더 부가가치가 클지 생각해보면 제약 분야가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을 앞으로도 많이 설득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