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에 무중력 환경을 재현하는 우주과학 연구시설이 들어섰다. 한국형발사체 누리호 후속모델인 차세대발사체를 먼 우주로 보낼 재점화 연구는 물론 우주의학 실험도 가능해 한국 우주과학의 핵심 인프라로 발돋음할 것으로 보인다.
백승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23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하나스퀘어에서 열린 한국마이크로중력학회에서 “충남 아산환경과학공원 그린타워에 120m 높이에서 자유낙하로 무중력 상황을 구현하는 드롭타워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우주는 중력이 거의 없고 태양과 먼 천체에서 방사선이 쏟아지는 극한 환경이다. 달과 화성 유인 탐사를 하려면 이런 우주에서 사람과 동식물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과학자들은 우주 궤도를 도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포나 소재가 겪는 변화를 연구해 신약과 신소재를 발굴하는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드롭타워는 우주정거장이 아닌 지상에서 무중력 환경을 만드는 실험장치다. 높은 곳에서 물체를 떨어뜨려 순간적으로 물체 내부에 무중력 환경을 만든다. 물체가 지구 중력가속도로 자유낙하하면 중량이 사라지는데 이때 흡사 우주인처럼 허공에 떠 있는 상태가 된다.
◇재활용 로켓 개발 위해 무중력 실험
항우연은 드롭타워에서 2030~2032년 달 탐사에 쓰일 차세대발사체의 재점화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발사체 재점화 기술은 엔진을 껐다가 다시 켜는 기술로 발사체를 먼 우주까지 보내거나 다시 지구로 재진입시킬 때 쓰인다. 스페이스X의 팰컨9과 같은 재활용 발사체에도 필요한 기술이다. 한국은 현재 지상에서 엔진을 점화하는 기술만 보유하고 있다.
로켓 연료인 극저온 추진제는 지상에서는 균일한 상태로 엔진에 주입된다. 하지만 무중력 환경에선 상황이 달라진다. 액체인 추진제와 탱크 압력을 유지하는 가스가 섞여 흡사 끓을 때 기포가 생기는 현상이 나타난다. 엔진에 이런 기체 방울이 섞여 들어가면 성능이 떨어지거나 고장이 난다. 세계 최대 발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페이스X도 팰컨9 개발 초기에 같은 문제로 실패를 겪었다.
재점화 기술을 개발하려면 먼저 액체 추진제가 우주환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누리호 같은 우주발사체에 실험장치를 싣고 우주에서 실험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또 실험을 수시로 하기도 어렵다. 대안이 드롭타워 같은 지상 무중력 환경 시험시설이다.
국내에는 스페이스 린텍이 강원도 정선의 한덕철광 수직 갱도에 설치한 드롭타워가 있다. 깊이가 500m에 이르는 대규모 시설이지만 주변에 부대 연구시설이 별로 없다. 지난 2022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미국 하버드 의대 매사추세츠종합병원(MGH)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의료복합타운에 드롭타워 건설 계획을 발표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항우연은 대전 본원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드롭타워 부지를 물색하다가 아산 그린타워를 찾아냈다. 아산시에서 발생하는 생활폐기물과 하수처리장에 친환경생태공원이 들어서며 150m 높이의 폐기물 소각로 굴뚝을 전망대로 바꾼 것이다. 연구진은 타워 맨위층부터 아래층까지 가운데가 비어있다는 점을 알고 아산시에 드롭타워 시설을 제안했다. 아산시도 주변 연구단지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우주 연구시설을 설치하는 데 적극 찬성했다.
항우연이 구축한 드롭타워의 높이는 120m로 미 항공우주국(NASA)와 독일 브레멘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맨 위층에는 자유낙하 장비 투하시설과 실험실을, 맨 아래층에는 떨어지는 시험장비를 받는 완충시설을 설치했다. 유이상 선임연구원은 “낙하에 걸리는 시간은 4초 정도로 짧지만 재점화 연구는 물론 무중력 환경이 필요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우연은 6월 아산시와 협약을 맺고 국내 기업과 연구기관에게 실험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무중력 환경은 우주정거장 외에 위성과 포물선으로 나는 항공기, 로켓, 드롭타워에서 구현할 수 있다. 드롭타워는 특히 초기 연구 단계에 있거나 우주 발사 비용이 부족한 기업들에겐 대안이 되고 있다.
◇제약사 실험실도 우주로 진출
드롭타워는 국내 우주 연구자나 우주기업에 중요한 인프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해외에서 무중력 환경에서 실험하려는 기업과 연구소는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잉과 록히드마틴 같은 전통적인 항공우주기업 외에 메이드인스페이스와 나노랙스 같은 신개념 우주제조 기업들도 우주정거장에서 3D프린팅 등을 활용한 신개념 제조기술을 발굴하고 있다.
제약사들도 무중력 환경에서 신약 연구를 하기 위해 우주로 진출하고 있다. 미국의 우주 기업 바르다 스페이스 인더스트리는 지난해 6월 원뿔 모양의 과학실험 인공위성 위네바고 1호를 우주로 발사했다가 최근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위성은 미국 제약사 화이자의 에이즈 치료제인 리토나비르의 단백질 결정을 성장시키는 실험장치를 탑재했다.
미국 머크도 면역항암제 키트루다를 피하주사로 만들 제조 방법을 찾기 위해 우주에서 실험을 했다. 길리어드사이언스는 코로나19 치료제인 렘데시비르의 안정성을 끌어올릴 조건을 찾기 위해 우주정거장에서 실험했다.
국내 제약사도 우주 과학 실험을 추진하고 있다. 보령과 미국 우주기업 액시엄스페이스가 공동 설립한 브랙스는 올해부터 국내외 기업과 우주과학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우주과학 실험 궤도 발사 지원 사업을 추진한다. 보령은 2022년 우주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대회인 ‘케어인스페이스(CIS)’를 연 데 이어 지난해부터 우주와 인간의 삶 전반을 사업 영역으로 확장한 ‘휴먼인스페이스(HIS)’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임동주 브랙스 대표는 “올해 우주 과학 실험을 지원하는 오비털 론치 펀딩을 처음 추가했다”며 “발사의 모든 과정을 액시엄 스페이스를 통해 공동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공위성도 우주 실험실로 발전
이번 학회에서는 국내에서 추진되는 다른 우주과학 실험 인프라도 소개됐다. 박찬흠 한림대 의대 교수는 인공위성을 과학실험실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인공위성에 생명과학 실험 장비와 데이터를 처리할 컴퓨터, 통신장비를 넣어 작은 우주실험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박 교수팀은 오는 6월 국내 발사체 기업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발사체로 회수용 바이오 실험장비를 우주에 보낼 계획이다. 2025년 11월까지 가로 34㎝, 세로 22㎝, 높이 10㎝인 큐브샛(초소형 위성)에 줄기세포로 세포를 배양하는 3D바이오프린팅 시스템을 실어 700㎞밖의 우주궤도에 올리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또 큐브샛보다 규모가 크고 지구로 귀환하는 위성 개발에도 착수했다. 2027년 지구로 귀환할 이 위성은 교모세포종을 배양하고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할 계획이다.
박 교수는 201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와 함께 우주정거장에 실험 장비를 보낸 일이 있다. 그는 “우주정거장에서 실험하면 비용도 많이 들지만 모든 결과를 공동 연구를 수행한 우주정거장 회원국에 제공해야 한다”며 “인공위성을 이용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국내 단독 연구가 가능해 독점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Acta Astronautica(2023), DOI : https://doi.org/10.1016/j.actaastro.2022.10.012
한국추진공학회지(2021), DOI: https://doi.org/10.6108/KSPE.2021.25.4.078
Applied Sciences(2020), DOI : https://doi.org/10.3390/app11010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