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우(53)씨는 27년 동안 여의도 증권사에서 파생상품 개발과 세일즈 트레이딩을 맡은 ‘증권맨’이다. 여의도 증권가의 베테랑이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 있다. 바로 앱(app·응용프로그램) 개발자다. 김씨는 “골프를 좋아하는데, 스마트폰을 이용해 골프장의 경사나 지형을 분석해서 어떻게 공을 치는 게 좋은지 조언해주는 앱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스마트폰에 내장된 센서의 성능이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내 손 안의 캐디’ 같은 서비스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 8일 포항시 지곡로의 포스텍 캠퍼스에 있는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에서 앱 개발자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 왼쪽부터 이가은, 김기우, 홍규희, 이승현씨./포스텍

대학생 때 잠깐 프로그래밍을 해본 적이 있지만 전문 앱 개발자가 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김씨가 수십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서 앱 개발자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건 애플이 운영하는 디벨로퍼 아카데미 덕분이다.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는 애플이 미래의 앱 개발자, 디자이너, 기업가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교육기관이다. 전 세계 17곳에 아카데미가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에만 있다.

지난 8일 경북 포항시 남구 지곡로에 있는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를 찾았다. 애플과 포항공대(포스텍)가 손을 잡고 대학 안에 세웠다. 아카데미가 자리한 포스텍 C5동 5층에 들어서자 포항이 아니라 애플 본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온 듯 이색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카데미에서 러너(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 모든 공간과 테이블이 협업과 소통에 맞게 마련돼 있었다.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저마다 노트북과 태블릿을 보며 토론을 하고 있는데도 쾌적함이 느껴질 정도로 공간이 넓었다. 김은정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 마케팅 매니저는 “테이블의 곡선면까지도 한 번에 두 명의 러너가 함께 모니터를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며 “아카데미의 모든 공간 설계와 구성에 애플이 직접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이날은 지난 3월 새로 시작한 아카데미 3기 러너 200명이 팀을 이뤄서 수행한 팀 챌린지(경진대회)에 대한 컨설팅이 진행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멘토(조언자)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 멘토도 화상회의에 참여해 러너들이 제시한 아이디어와 서비스에 대해서 의견을 주면서 함께 토론하고 있었다. 멘토팀 리드인 윤성관씨는 “이번 팀 챌린지의 주제는 ‘내 옆의 한 사람만을 위한 서비스’라는 주제로 진행하고 있다”며 “보다 신선한 시각을 얻기 위해 애플팀과 인도네시아 아카데미 멘토들이 함께 참여했다”고 말했다.

포스텍에 위치한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의 메인 랩 공간. 200명의 러너와 멘토들이 함께 협업하는 공간이다./포스텍

아카데미는 9개월 동안 진행된다. 이 기간 러너들은 포스텍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애플은 러너 1인당 매달 100만원의 학습지원장학금과 앱 개발에 필요한 애플 장비를 무료로 지원한다. 경쟁률도 치열하다. 한 번 러너를 선발할 때 보통 경쟁률이 10대 1, 20대 1에 달한다고 한다.

아카데미가 모든 국가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서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 기수도 싱가포르와 일본에서 온 러너가 있다. 홍규희(31)씨는 마이크로소프트 재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앱 개발자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로 왔다. 홍씨는 “도쿄에서 5년 정도 IT(정보기술) 업계에서 일하면서 기업 고객을 상대로 클라우드(가상서버) 인프라를 짜는 일을 했다”며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고 직접 쓸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아카데미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승현(24)씨는 싱가포르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취업까지 했다가 아카데미에 합격하면서 한국에 왔다. 이씨는 “3살부터 싱가포르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길게 지내는 건 오랜만”이라며 “개인적으로 큰 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멘토들과 이야기하면서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아카데미의 멘토들은 “월드 클래스 개발자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개발자가 되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기보다 애플의 가치관을 전달하는 게 아카데미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앱을 만드는 개발 능력보다도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협업과 소통 능력을 기르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다.

아카데미는 이를 ‘T자형 인재’라는 말로 설명했다. 가로, 세로 선이 만나 T라는 글자를 이루듯, 한 분야에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영역과 잘 융합하고 협력할 수 있는 인재가 T자형이라고 했다.

포스텍에 위치한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 러너들과 멘토들의 협업을 목적으로 공간을 설계했다고 아카데미는 설명했다. 공간의 이름도 협업을 강조한 콜랩(Collaboration Lab)이다./포스텍

이번 기수에는 쉰 살이 넘는 김기우씨부터 열아홉 살까지 서른네 살 차이가 나는 러너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문화와 환경도 다른데 어떻게 스스럼 없이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는 걸까. 김씨는 자신의 닉네임(별명)인 ‘앤디’를 언급하며 “서로를 닉네임만으로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나이 차이를 허물 수 있게 됐다”며 “직장 생활을 할 때는 20대 대리나 아들과도 이야기할 일이 많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편하게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씨도 “예전에는 나 혼자 하고 싶은 것만 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의 피드백(의견)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며 “팀 활동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성과는 상당하다. 작년 12월 6일 기준으로 아카데미 1기와 2기 출신이 만든 앱이 110개에 달한다. 이가은(22)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아카데미 1기 출신인 이씨는 ‘체리쉬(Cherish)’라는 일기 앱을 출시하고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앱의 포맷이 달라진다. 이가은씨는 1기를 졸업하고 학교에 돌아갔다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와 본격적인 창업을 위한 도움을 받고 있다.

이가은씨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가치를 추구하면 사용자는 따라온다’는 말인데, 실제로 앱을 만들고 따로 마케팅도 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용자가 모였다”며 “국내에는 1인 앱 개발자가 많지 않은데 아카데미에서 개발뿐만 아니라 기획과 디자인도 함께 배운 게 사업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