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자립은 대한민국의 오랜 꿈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에너지 소비량이 세계 8위 수준까지 올랐지만, 에너지 해외 의존도는 90%가 넘는다. 에너지를 수입하는 데만 150조원에 달하는 돈을 매년 써야 한다.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원자력발전의 원천 기술도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 많은 탓이다.
불가능해보이기만 하는 에너지 자립의 꿈이 조금씩 현실로 바뀌는 곳이 있다. 대전역에서 차로 30여분을 가면 대덕연구단지가 나오고, 그 안에서도 제일 끝까지 가면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는 얕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겨울비가 내리던 지난 12월 15일 이곳을 찾았다. 20년, 30년 뒤 한국 경제와 산업을 책임질 미래 기술이 싹 트는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원 건물은 겉으로 보기엔 여느 공공기관과 다름 없었지만, 한국형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가 있는 건물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가장 먼저 나타난 건 원전이나 로켓을 제어하는 공간처럼 수많은 컴퓨터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KSTAR 제어실이었다. 제어실에는 수많은 연구원들로 분주했다. 12월 21일부터 시작되는 플라즈마 실험을 앞두고 준비 작업이 한창이었다. 제어실 한쪽에는 ‘NEXT SHOT 3293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윤시우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KSTAR연구본부장은 “2008년 첫 플라즈마 점화 이후 지금까지 3만2938샷을 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샷(shot)은 플라즈마 발생 실험 단위를 말한다.
제어실을 지나 안전 장비를 착용하자 마침내 KSTAR가 모습을 드러냈다. KSTAR는 지름 10m, 높이 6m의 크기다. 이것만도 작은 크기는 아니지만, 실제로 눈 앞에 모습을 보인 KSTAR는 상상보다 훨씬 거대했다. 실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KSTAR 진공 용기 외에도 플라즈마를 가열하는 가열장치나 냉각시설까지 함께 연결돼 있어 전체 시설은 덩달아 커진 것이다.
KSTAR 연구동 내벽 한쪽에는 제작에 참여한 국내 기업들의 로고가 가득 붙어 있었다. 삼성, 현대, 두산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의 이름도 셀 수 없었다. 윤 부원장은 “KSTAR는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첨단 연구장비여서 제작에 참여한 중소기업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역량을 실증하는 기회가 됐다”며 “덕분에 KSTAR 제작에 참여했던 기업들 중 여럿이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건설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챗GPT의 아버지도 달려든 꿈의 에너지 ‘핵융합’
핵융합 발전은 태양이 빛과 열을 내는 원리를 모방했다. 원자력 발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늘 있고, 고준위방사성 폐기물이라는 처리가 곤란한 쓰레기를 남긴다. 반면 핵융합은 사고의 위험이 적고 방사성 폐기물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지난 15일 방문한 KSTAR에는 방사선 준위를 알려주는 표시기가 있었는데 시간당 10μSv(마이크로시버트) 수준에 불과했다. 근처에 10시간을 있어야 엑스레이를 한 번 찍는 수준이다. 윤 부원장은 “실험을 할 때는 방사능 수치가 높아지지만 장치가 꺼지면 곧바로 안전한 수준으로 낮아진다”며 “안전성이 핵분열과 다른 핵융합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핵융합의 또다른 장점은 경제성이다.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이용하는데 둘 다 지구에 무한에 가깝게 존재한다. 비유하면 욕조 한 개 분량의 바닷물만 있으면 가정집이 80년 동안 쓸 전력을 만들 수 있는 게 핵융합 발전이다. 3면이 바다인 한국 입장에서 바닷물이 수입할 필요도 없는 천연 자원이 되는 셈이다.
다만 핵융합 발전은 아직 상용화는 커녕 이론적인 단계일 뿐이다. 태양은 중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1000만도에서도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지만, 중력이 낮은 지구에서는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려면 온도가 1억도까지 높아져야 한다. 1억도의 높은 온도의 플라즈마를 자기장에 안정적으로 가두는 기술(토카막)을 개발하는 게 핵융합 발전의 관건이다. 한국은 2021년 1억도의 플라즈마 온도를 30초 동안 유지하면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KSTAR의 1차적인 목표는 300초다. 300초는 플라즈마가 안정적인 상태로 실제 핵융합 발전이 가능한 분기점이라는 게 연구원의 설명이다.
한국을 비롯해 핵융합 선진 7개국(한국, 미국, EU, 러시아, 인도, 중국, 일본)은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를 함께 건설하고 있다. KSTAR보다 거대한 국제핵융합실험로로 대용량의 핵융합에너지 생산을 목표로 한다. ITER에서 핵융합에너지 생산 실증에 성공하면 7개국은 함께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저마다 실증로 건설과 핵융합 상용화에 뛰어들게 된다. 대략적인 상용화 시점은 2050년이다.
최근에는 막대한 자금을 등에 업은 핵융합 스타트업들이 판을 흔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미국의 핵융합 발전 스타트업인 헬리온 에너지가 2028년부터 50㎿의 핵융합 발전에 나서겠다고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헬리온 에너지는 토카막이 아닌 ‘FRC(Field Reversed Configuration)’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아령처럼 생긴 FRC는 장치의 양쪽 끝에서 시속 160만㎞의 빠른 속도로 플라즈마를 쏘고, 장치의 가운데에서 두 개의 플라즈마가 서로 부딪히면서 고온·고압의 플라즈마를 유지하게 하는 식이다.
헬리온 에너지가 이렇게 서두르는 건 챗GPT 때문이다. 챗GPT의 아버지로 불리는 샘 알트만 오픈AI 최고경영자는 헬리온 에너지에 3억7500만달러(약 4900억원)를 투자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건 운영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는 챗GPT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는 저비용 에너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샘 알트만은 핵융합 발전의 미래를 앞당기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은 셈이다. 물론 많은 핵융합 발전 전문가들은 헬리온 에너지의 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텅스텐 갑옷 입은 KSTAR…300초를 향해 달린다
KSTAR는 2023년 한 해는 플라즈마 실험을 지속하는 대신 핵심 설비를 업그레이드하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핵심 장치 중 하나인 디버터를 기존의 탄소 소재에서 텅스텐 소재로 바꾼 것이다.
디버터는 핵융합로 내부에서 발생하는 플라즈마의 강한 열속이 집중되는 진공용기 하단에 위치한 플라즈마 대면장치다. 1억도에 달하는 플라즈마 열속이 직접 진공용기에 닿지 않도록 방패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각종 불순물을 배출하는 통로 역할도 한다. 장시간 동안 초고온 플라즈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디버터의 성능을 높이는 게 필수다. 윤 본부장이 텅스텐 디버터 교체를 “중요한 마일스톤”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디버터 소재를 탄소에서 텅스텐으로 바꾸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연구원이 텅스텐 디버터 개발에 착수한 게 2018년이다. 무려 5년이 걸린 셈이다. 텅스텐은 금속임에도 충격에 쉽게 깨지기 때문에 KSTAR의 복잡한 형태에 맞는 디버터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텅스텐과 냉각수가 흐르는 구리소재 냉각관 접합도 쉽지 않았다. 3년에 걸친 연구 끝에 2021년에야 첫 시제품이 나왔고, 2022년 9월에 기존 디버터 해체 작업이 시작됐다. 새롭게 설치된 텅스텐 디버터는 텅스텐 소재의 모노 블록으로 만들어진 총 64개의 카세트가 모여 KSTAR 내부의 진공용기 하단부를 360도 두르는 형태로 이루져 있다.
새로운 텅스텐 디버터를 두른 KSTAR는 지난 21일부터 플라즈마 실험에 착수했다. 플라즈마 실험은 한 번 시작하면 몇 달 동안 이어진다. 플라즈마를 한 번 점화하는 데만 수천만원이 들기 때문에 실험이 시작되면 어지간해서는 중단하지 않는다. 윤 본부장은 “2026년에 1억도 플라즈마를 300초 유지하는 게 목표”라며 “KSTAR는 초고온과 고밀도를 동시에 가져가는 게 목표인데 300초라는 초고온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는 고밀도를 달성하기 위해 다시 가열장치나 여러 설비에 대한 업그레이드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연구장비는 대통령 결단 있어야… ITER 가동 현장서 보는 게 꿈”
윤시우 본부장은 KSTAR의 탄생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다닐 때부터 핵융합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은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윤 본부장에게 KSTAR가 가동을 시작하고 15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다. 그는 장치를 만들고 처음 플라즈마 가동 버튼을 눌렀던 2008년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플라즈마 점화에 성공한 건가.
“그건 아니다. 당시에 내가 KSTAR 운전 시나리오 개발 책임자였다. 그런데 가동 스위치를 눌렀는데 켜지지가 않았다. 온갖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수정하면서 2주가 넘는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2주 반이 지나서 플라즈마 최초 발생에 성공했다. 그때가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연구원 모두가 잠도 못 자고 고생했다. 첫 점화에서 성공한 핵융합연구시설은 전 세계에 KSTAR가 유일하다. 일본은 첫 플라즈마 발생에 3년이 걸렸다. 퍼스트 플라즈마 이후에는 빠르게 영역을 확장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핵융합 기술은 대학 연구실 수준이었다. 어떻게 기술 선진국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었나.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핵융합 연구에 나선 게 1995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정근모 장관이 핵융합에 대해서 이니셔티브를 잡고 해보자고 추진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그걸 승인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의 프로젝트가 됐다. 예타를 한 것도 아니었고 대통령의 결단이 중요했다. 한 분야에 많은 돈을 투자하려면 다른 분야의 불만이 많았을 텐데 그걸 뚫고 KSTAR를 짓기로 한 것이다. KSTAR는 7개국이 함께 건설하는 ITER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선제적인 투자를 통해 핵융합 기술을 육성할 수 있었다.”
-KSTAR는 연구시설이다. 실제 전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중요한가.
“핵융합은 아직 상용화가 안 됐다. 발전소를 짓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기술이 필요하고 그걸 개발하는 단계다. 과거 원자력 발전소는 미국이 핵심 기술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걸 가져다 쓰는 방식이어서 아직까지도 원전 수출 과정에서 미국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있다. 반면 핵융합 발전은 ITER에 참여한 7개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만큼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추가 개발도 제한이 없다. ITER는 아직 건설 중인 만큼 우리가 자체적으로 핵융합 발전 기술을 키울 필요가 있는데, KSTAR가 그 역할을 해준 것이다. KSTAR 건설을 통해 쌓은 지식과 노하우로 핵융합 관련 10대 원천기술을 우리가 확보할 수 있었다.”
-연구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 내년도 R&D 예산 삭감의 영향이 없지 않을텐데.
“예산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전기료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이 됐다. 가장 아쉬운 건 사람이다. 핵융합이라고 해서 원자핵공학과 출신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인공지능이나 전자공학, 기계공학 엔지니어들이 모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뛰어난 엔지니어를 구하는 게 정말 힘들다. 앞으로는 공학적인 과제가 많아서 엔지니어가 더 필요한데 민간과의 인건비 격차가 크다보니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 중국은 우리와 장치를 가동한 시기는 비슷한데 ‘샷’이 3배 가까이 많다. 그만큼 많은 인력을 투입해서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실험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2024년의 목표는 대형연구시설 구축이다. 핵융합 발전 위한 8가지 핵심 기술이 있는데 기술별로 로드맵을 짜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부족한 기술이 삼중수소를 증식하는 기술이다. 삼중수소는 핵융합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데, 우리 기술은 아직 기술성숙도(TRL)로 치면 2~3 수준에 불과하다. ITER에서는 아직 연구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어서 삼중수소를 증식하는 별도의 장비나 시설이 필요하다. 대형연구시설이다보니 5000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 연구원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함께 예비타당성조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의 핵융합 기술 개발과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목표가 있다면.
“내 은퇴 시점이 2032년 정도다. ITER가 가동에 들어가는 게 2038년 정도로 예상된다. 은퇴 이후지만 내 돈을 내고서라도 ITER가 가동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연구자들이 원자폭탄 실험을 먼 발치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처럼 그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 ITER가 가동을 시작하면 핵융합 발전을 연구자의 손을 떠나 기업과 산업 차원에서 빠르게 굴러갈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대용량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 있고, 한국 입장에서는 에너지 자립을 가능하게 해줄 원천 기술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