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흥행을 한 ‘쥬라기 공원’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이 유전자 가위다. 영화에서는 호박에 갇혀 있던 모기의 피에서 공룡 DNA를 찾아낸 뒤에 개구리 DNA를 잘라 붙이는 방식으로 공룡을 되살렸다. SF 영화로만 여겨졌던 기술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현실을 바꾸고 있다. 유전자 교정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질병에 대한 적응력을 높인 작물이 미국과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고, 난치병 치료제도 조만간 시장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유전자 가위 기술의 선두를 달리는 국가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쟁국에 비해 과도한 규제 탓에 상업화는 늦어지고 있다. 조선비즈는 6회에 걸친 기획을 통해 유전자가위 기술의 현재와 가능성을 짚어보고, 규제 개선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편집자 주]
유럽연합(EU)은 지난 7월 ‘천연 자원의 지속 가능한 이용을 위한 조치’라는 이름의 법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앞으로 유럽 농가에서는 유전자가위 기술로 개량한 유전자 편집 종자의 재배와 판매가 가능해진다. 세계 주요 국가 중 유일하게 유전자 편집 종자를 ‘유전자 변형 작물(GMO)’로 분류했던 EU가 규제를 개선해 관련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농업의 반도체’라고도 불리는 종자는 농업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기술의 집합체다. 생산성이 높고 재배가 쉬운 종자의 가치는 첨단 산업 기술에도 뒤쳐지지 않는다. 유전자가위 기술 기업 툴젠에서 종자사업을 총괄하는 한지학 종자사업본부장은 “전 세계 종자 산업 규모는 약 60조원으로 추정된다”며 “이를 가공 산업까지 확대하면 1000조원 규모로 막대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그간 종자 산업에서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한국의 종자 수입액은 1조6500억원에 달한다. 반면 종자를 수출해 얻은 수익은 7000억원에 불과하다. 1조원이라는 막대한 돈이 종자를 들여오기 위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바꿔서 말하면, 국내에서 재배되는 작물의 대부분이 해외에 비용을 주고 들여 온 것이라는 의미다.
한국에게 단번에 전세를 역전할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유전자 편집 종자의 등장이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종의 작물을 접붙이거나 교잡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종자의 개발이 이뤄졌다면, 최근에는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표적 유전자를 정확히 교정하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유전자 가위는 절단 효소로 DNA에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 질병을 막거나 농작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교정 기술이다. 1세대 징크 핑거에 이어 2세대 탈렌, 3세대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까지 개발됐다. 탈렌은 단백질로 원하는 유전자에 절단 효소를 결합시키며, 크리스퍼는 리보핵산(RNA)이 그 역할을 한다. 2014년 세균의 면역 시스템을 본떠 개발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정확도가 높고 비용은 저렴해져 유전공학 분야에서 차세대 동력으로 꼽힌다. 한국도 높은 수준의 유전자가위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전통 육종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잃은 경쟁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유전자 편집 종자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전성이다. 직접 유전자를 개량하는 ‘유전자 변형 작물(GMO)’과 비교해 인체에 위험을 미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GMO는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종자에 넣어 새로운 특성을 갖게 하는 기술이다. 가령 추위에 약한 토마토에 추운 바다에서 사는 북극 가자미의 단백질 유전자를 넣으면 추운 날씨에도 재배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토마토와 북극 가자미가 자연 상태에서 유전자를 섞을 수는 없다. 자연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수준의 유전자 변형이 필요한 만큼 인체에 위험할 수 있다는 시선이 있다.
유전자 편집 종자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이와 같은 원리를 사용하는 만큼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유전자 교정 정확도는 99%에 달한다. 이때 편집되는 디옥시리보핵산(DNA)은 염기 1개에 그친다. 이런 변이는 자연 상태에서도 100만번에 한번꼴로 일어난다. 비율에 차이가 있을 뿐 이미 만들어진 유전자 편집 종자를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자연에서 만들어지는 변이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신품종을 개발하는 데 걸리는 비용과 시간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한 본부장은 “심한 규제를 받는 GMO를 개발하려면 기간은 10년, 비용은 1300억원 정도가 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반면 유전자 편집 종자는 1년 가량 수억원만 투자해도 쉽게 신품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편집 종자는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생산량을 늘리거나 특정 영양분의 함량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혈압을 낮추고 항산화 작용이 있는 ‘가바(GABA)’의 함량을 높인 토마토가 판매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유전자편집 기술로 만든 채소를 이용한 샐러드도 출시됐다. 이들 국가는 유전자 편집 종자를 GMO가 아니라고 보고 다른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종자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유전자 편집 종자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내 종자 산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유전자 편집 종자를 여전히 GMO로 보고 있다. GMO에 적용하는 일부 규제를 면제해주는 방안이 의논되고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유전자 편집 종자를 연구하고 있는 최성화 지플러스생명과학 대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일부 규제를 면제하더라도 유전자 편집 종자를 GMO로 규정하면 재배 자체도 어렵고, 유통·판매는 불가능한 수준”이라며 “정부의 계속된 무관심은 종자 산업의 자멸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전 세계 인구는 80억명을 돌파해 2011년 70억명에서 11년 만에 10억명이 늘었다. 인구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식량 생산량은 제자리 걸음이다. 국제곡물위원회가 지난 3월 발표한 ‘전 세계 곡물 시장 전망’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농업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2% 감소할 전망이다. 작년 10월 네이처 클라이밋 체인지에 발표된 논문을 보면 2050년까지 전 세계 식량 공급은 4%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가 늘어나는데 식량 생산은 줄어들고 있다.
식량 위기가 더욱 심화되면 생산성이 높고 부가가치를 가진 종자의 가치는 더 커질 전망이다. 이미 한국은 유전자가위 기술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규제에 막혀 유전자 치료제는 물론 종자 산업에서도 산업 경쟁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한 본부장은 “앞으로 5년 이내에 종자 산업의 판도가 유전자가위 기술로 격변할 것”이라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국제 트렌드에 맞는 규제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