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미국의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우주 분야의 기업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한국이 민간 기업이 중심이 되는 우주 개발을 뜻하는 ‘뉴스페이스’를 천명한 것과 반대로 글로벌 우주 산업은 올해 들어 분위기가 빠르게 식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기사에 나오는 글로벌 우주 기업들은 한국의 우주 스타트업들이 벤치마킹하고 있거나 롤 모델로 삼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롤 모델에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는데 한국의 우주 스타트업들은 문제가 없는 걸까.
◇자르고, 또 자르는 우주 기업들
영국의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이 설립한 우주발사체 기업 버진오빗(Virgin Orbit)이 파산한 것은 시작이었다. 버진오빗은 자금난에 시달리다 결국 대주주인 브랜슨 회장이 자금 지원을 포기하면서 지난 4월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서를 제출했고, 결국 파산처리됐다.
버진오빗의 파산을 전후로 글로벌 우주 기업들 가운데 재정 상태에 빨간 불이 들어온 곳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위성으로 지구를 관측하고 그 데이터를 판매하는 서비스인 지구 관측(Earth Observation) 분야의 대표 기업인 플래닛 랩스는 이달 초 전체 인력의 10%인 117명 구조조정한다고 발표했다. 플래닛 랩스의 최고경영자(CEO)인 윌 마샬은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예상보다 적었다며 수익 창출을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플래닛 어스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새틀로직 역시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했다. 새틀로직은 작년 하반기 전체 직원의 18%를 줄인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8%의 직원을 줄였다.
미국의 우주발사체 기업인 아스트라 스페이스는 로켓 발사를 중단하면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2021년 7월 상장 직후에는 15달러를 넘겼던 주가가 지금은 1달러도 채 되지 않는다. 아스트라 스페이스 역시 이달 초 7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아스트라 스페이스의 CEO인 크리스 켐프는 인력 감축을 통해 분기당 400만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우주 기업들에 투자를 해온 벤처캐피탈 프로머스 벤처스의 설립자인 마이크 콜렛(Mike Collett)은 WSJ과의 인터뷰에서 “이들 기업의 고통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롤 모델이 사라졌다
문제는 이들 기업이 한국 우주 스타트업의 롤 모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플래닛 랩스나 새틀로직의 위성 데이터 서비스는 한국 스타트업인 나라스페이스테크놀로지가 준비하는 사업이고, 이노스페이스나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같은 국내 우주발사체 기업들은 아스트라 스페이스처럼 소형 발사체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력이나 자금력에서 밀리는 국내 우주 스타트업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우주 기업들도 실패한 비즈니스에 뒤늦게 뛰어들어봤자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진단한다. 지금이라도 롤 모델을 바꾸고 전략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우주분야 자문회사인 쇼크프리딕션테크놀러지스를 운영하는 제임스 황 박사는 얼마 전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이나 연구소 차원에서 기술이 축적된 이후에 시간이나 문화적인 환경이 조성돼야 기업들이 뉴스페이스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데, 한국은 다른 나라들이 ‘뉴스페이스’를 한다고 하니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따라하기 급급해 보인다”며 “한국은 아직 시장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기술력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뉴스페이스를 할 환경 자체가 조성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제임스 황 박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스페이스X와 버진오빗 같은 미국의 우주 기업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나마 성공적인 우주발사체 기업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로켓랩 같은 회사도 생존을 위해 전략을 바꾸고 있다. 로켓랩은 최근 주력 사업 모델을 소형 발사체에서 중대형 발사체로 바꿨다. 로켓랩의 임원은 최근 한 투자자 회의에서 로켓랩의 현금 흐름은 뉴트론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발사체 기업들은 소형 발사체에만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투자 유치 나서는 ‘K-뉴스페이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우주 스타트업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보다 출발이 늦은 탓에 자본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에 투자 유치라는 힘든 관문을 건너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국내 우주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우주발사체인 ‘한빛-TLV’ 발사를 성공한 이노스페이스는 지난달 상장 전 자금유치 단계인 프리IPO에서 154억원을 투자받았다. 지금까지 누적 투자유치는 700억원이 넘는다. 이노스페이스는 기술특례상장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는 재사용발사체 시연체를 이용해 고도제어 시험과 자세제어 성능 시험 등을 진행하고, 노르웨이 안도야 우주센터와 발사장 사용 계약도 체결할 계획이다.
발사체 스타트업인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역시 내년 상장을 목표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역시 코스닥시장에 기술특례상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올해 안에 상장 승인을 받고 내년 1분기 상장하는 게 목표다.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측은 “해상발사장 구축이 거의 마무리됐다”며 “연말로 예정된 해상 발사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라스페이스테크놀로지는 삼성증권을 상장 주관사로 선정했고, 2024년 말을 목표로 코스닥시장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4분기 미국 스페이스X의 팰컨9에 실어서 발사할 예정인 초소형위성 ‘옵저버’가 나라스페이스테크놀로지의 사업 계획에서 가장 중요하다. 나라스페이스테크놀로지는 2027년까지 100개 이상의 초소형위성을 띄울 계획인데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