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이 전자 궤적을 자유자재로 조절해 소자 성능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전자의 ‘궤도 홀 효과’를 세계 최초로 구현해 저전력 자성메모리 소자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최경민 성균관대 에너지과학과 교수와 이현우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공동연구팀은 경금속 내부에서 전자의 궤적을 휘도록 제어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구현한 연구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6일 발표했다.
전자는 반도체에서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자의 속도와 개수, 움직임 등을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방법에 따라 성능을 향상할 수 있다.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빠른 공과 느린 공, 변화구를 능숙하게 조절하면 승률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셈이다.
반도체 기억 소자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이 ‘홀 효과(Hall Effect)’다. 홀 효과는 전류가 흐르는 고체에 자기장을 가하면 전자의 궤적이 휘어지면서 전위차가 발생하는 현상이다.
홀 효과를 기존 기술로 구현하기 위해선 자기장 생성에 높은 전류가 필요하다. 또 각 소자를 동작시키려 서로 다른 방향의 자기장을 가해야 하는데, 소자 집적도가 높은 전자기기에서는 세밀한 제어가 어렵다. 이에 자기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단위의 미세한 전자 궤적을 낮은 전력으로 제어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연구팀은 ‘궤도 홀 효과(Orbital Hall Effect)’를 이용해 전자 궤적을 제어하는 기술을 구현했다. 궤도 홀 효과는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공전하면서 발생하는 각운동량을 이용해 전자를 제어한다. 그동안 고체 내부의 전자가 궤도 각운동량을 가지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전기장을 걸어주는 간단한 방법으로 ‘오비트로닉스(Orbitronics)’를 구현했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그동안 홀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주로 ‘스핀 홀 효과(Spin Hall Effect)’가 사용됐다. 전자의 회전과 자전을 이용한 스핀 각운동량을 디지털 신호로 인식하는 기억 방식이다. 스핀 홀 효과는 주로 백금이나 텅스텐, 하프늄 같은 원자번호가 큰 중금속에서만 발현된다. 이 금속들은 희소성이 높아 가격이 비싸고, 채굴 방식도 친환경적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궤도 홀 효과는 가벼운 원소로 구성된 경금속에서 발현할 수 있다. 연구팀은 경금속에 해당하는 타이타늄(Ti) 내부에서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궤도 각운동량을 이용해 전자 궤적을 휘게 만드는 궤도 홀 효과를 구현했다. 그동안 이론으로만 있던 궤도 홀 효과를 세계 최초로 시현한 것이다.
이번 연구성과는 자성메모리(MRAM)를 기반으로 한 반도체 개발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존 메모리 반도체는 고집적도 메모리가 가능하지만, 전자 개수의 변화를 활용하기 때문에 동작 속도가 느리고 전력 소비가 크다는 단점을 가진다. 반면 MRAM은 전자의 궤적을 이용해 동작 속도와 횟수 측면에서 장점을 가진다. 특히 스핀과 궤도 홀 효과를 결합해 대표적인 저전력 차세대 메모리인 MRAM 개발에 응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경민 교수는 “3차원 정보를 이용해 궤도 각운동량이 어떤 식으로 전달되는지 실험적으로 궤도 홀 효과를 명확하게 규명했다”며 “궤도 홀 효과는 가벼운 경금속에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다양성 측면에서 산업적인 응용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또 “이번 연구결과는 각운동량을 제어하는 기술을 통해 MRAM 소자의 저전력 동작과 고속 동작 특성을 향상하는 데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고자료
Nature,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