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웨이퍼.(본 기사와는 무관함.) /뉴스1

디지털 영상 솔루션 기술을 보유한 A사는 각종 생산 공정에 활용되는 디지털 투시기, 조영 촬영 장비를 수출하는 중견기업이다. 직원만 400명에 매출의 76%가 수출에서 나올 정도로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각종 공정에서 사용되는 산업용 카메라에선 국내 1위를 달리고 있다.

A사는 지난 2021년 황당한 소송에 휘말렸다. 미국의 특허전문회사(NPE)에서 A사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NPE는 직접적인 생산 활동은 없이, 특허를 사들여 침해소송으로 기술료 이익을 얻어내는 회사를 의미한다. 이 미국 회사는 A사 제품에 포함된 카메라 제어 기술이 자신들이 보유한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주로 삼성전자나 LG전자와 같은 한국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기업을 공격했던 NPE들이 최근에는 국내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을 겨냥해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기업과 함께 국내 산업을 떠받치는 한국의 중소·중견기업의 기술력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특허 전문 인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 기업이 손쉽게 특허괴물로 불리는 해외 NPE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어서 정책 당국의 주의가 요구된다.

28일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의 미국 내 NPE와 관련된 피소 건수는 총 126건으로 대기업은 114건, 중견기업은 3건, 중소기업은 9건으로 나타났다. NPE와 벌인 특허분쟁 10건 중 1건은 중소·중견기업이었던 셈이다.

한국 기업의 미국 내 NPE 분쟁이 2021년 149건이던 점을 고려하면 전체 건수는 소폭 감소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중소·중견기업의 분쟁 건수는 6건에서 12건으로 2배나 증가했다.

특히 5년 전인 2018년만 해도 중소·중견기업의 미국 내 NPE 분쟁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이후 중소·중견기업 NPE 분쟁 건수는 2019년 3건, 2020년 6건, 2021년 6건으로 줄곧 한 자릿수를 기록하다가 지난해 처음 두 자릿수로 올라섰다. 여전히 NPE의 특허침해소송 대상이 대기업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기술력을 갖춘 중소·중견기업도 NPE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나기 힘든 추세인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NPE는 특허를 사들인 뒤 관련 기술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한다. 사냥감이 된 기업들은 막대한 소송비용과 수출 중단, 제품 이미지 실추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 NPE에 특허침해소송을 당한 A사는 일정 범위 내 2D 영역을 초고해상도·초고속으로 촬영할 수 있는 산업용 카메라를 제조하는 기업이다. 산업용 카메라를 미국과 중국, 유럽에 수출하면서 관련 특허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높은 기술력을 보유한 A사였지만, NPE의 공격에 소송비용 지출과 제품 이미지 실추로 인한 수출 제한을 우려했다.

A사는 매출 대부분이 수출에서 발생하는 만큼, 해외 특허침해소송으로 인한 수출 중단은 치명적이었다. 특히 A사에서 특허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3명 남짓이어서 신속한 대처도 어려웠다. A사는 한국지식재산보호원에서 제공하는 국제 지재권분쟁 대응전략 지원사업으로 다행히 미국 NPE의 소송 취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중소·중견기업은 대기업처럼 특허 전문 조직을 마련하지 못해 NPE와의 특허분쟁에 휘말리게 되면 큰 신속한 대처가 불가능하다. 이에 특허청과 한국지식재산보호원, 국가지식재산위원회는 '해외 NPE 특허분쟁 지원대책'이나 '특허분쟁 대응전략 지원사업' 등으로 특허 전담인력과 소송경험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지식재산보호원 관계자는 "최근 NPE가 대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던 것에서 기술력을 보유한 중소·중견기업을 목표물로 삼는 것이 통계상으로도 드러난다"며 "특허 전담조직을 구성할 여력이 되지 않는 중소·중견기업이 아직 많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고, 자칫 특허침해소송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허업계에서는 한국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NPE 분쟁이 계속되면 산업 기술력 확보에도 치명적일 수 있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특허업계 관계자는 "국내에도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한 중소·중견기업이 많고, 이들이 국내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며 "정부도 해외 NPE로부터 중소·중견기업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더 내놓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