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글자만 남긴 게 아니었다. 그 안에 수천 년 전 양모(羊毛) 생산이 확대되면서 가축과 함께 퍼진 전염병의 역사도 고스란히 남았다. 책의 재료가 양이나 염소,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더블린대 농업식품과학부의 케빈 데일리(Kevin Daly) 교수 연구진은 중세의 종교, 법률 서적에서 추출한 양두(sheep pox) 바이러스 DNA를 통해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염병의 진화 과정을 추적했다고 지난 2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밝혔다.
양두는 양에게 고열과 피부에 고름이 찬 농포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가축 전염병이다. 한 번 퍼지면 양 떼 새끼 중 50~80%가 죽을 수 있다. 양모·육류·우유 생산량도 떨어뜨려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힌다.
◇중세 필사본에서 바이러스 DNA 검출
데일리 교수는 "이번 연구는 양피지가 문화적 역사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 가축의 질병 현황까지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양피지는 양이나 염소, 송아지 가죽을 가공해 글자나 그림을 그리는 재료로 만든 것이다. 12세기 종이가 유럽에 퍼지기 전까지 중세 서적은 대부분 양피지로 만들었다.
연구진은 중세 서적의 양피지 표면을 지우개로 부드럽게 문질러 생체 시료를 채취했다. 분석 결과 1000년 된 요크 복음서(York Gospels)의 한 페이지에서 양두 바이러스의 DNA가 나왔다. 다른 영국과 유럽의 중세 필사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양피지에서 바이러스 DNA를 검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양피지를 만들려면 동물 가죽을 부식성 화학 물질인 석회가 채워진 구덩이에 며칠 동안 담가 살점을 없애고 표백한다. 그 뒤 틀에 끼워 늘리고 표면을 깎고 문질러 만든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도 바이러스 DNA가 남은 것이다.
게다가 필사본은 수세기 동안 글이 쓰이고 손때를 탔기 때문에, 양피지에 갇혀 있던 DNA가 분해되거나 오염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양피지에 바이러스 DNA가 남은 것은 양두에 걸리면 바이러스가 피부 조직에 높은 농도로 있기 때문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다만 양두 DNA가 검출됐다고 그 양피지를 만든 동물이 반드시 양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연구진은 실제로 양 가죽 3장과 함께 송아지 가죽 10장, 염소 가죽 4장에서도 양두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가죽을 한곳에서 가공하는 과정에서 감염된 양의 피부에서 다른 가죽으로 바이러스 DNA가 묻었을 가능성도 있고, 드문 종간(種間) 감염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양 집단 사육, 이동하면서 바이러스 퍼져
가장 오래된 양두 바이러스 DNA는 기원전 1700년 청동기 시대 양의 치아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양두는 최소한 3700년 이상 유라시아 지역 사람들의 식량 안보를 위협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양피지에서 나온 양두 바이러스의 진화 과정도 추적했다.
DNA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돌연변이가 축적된다. 중세 양피지에 남은 바이러스 DNA의 돌연변이를 역추적하면 언제 출현했는지 알 수 있다. 연구진은 고대와 현대 양두 바이러스의 DNA 둘연변이 형태를 비교했다.
분석 결과 양두 바이러스의 공통 조상은 약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무렵은 베틀추 같이 양털로 실을 자아 천을 만든 직조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가 나온 시기와도 겹친다.
당시 유라시아 대초원의 사람들은 천을 짤 양모를 얻기 위해 양을 더욱 집약적으로 사육했다. 그런 환경은 바이러스가 양을 숙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또 청동기 시대 유목민들이 양떼를 몰고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넓은 지역에 빠르게 퍼뜨렸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Science Advances(2026), DOI: https://doi.org/10.1126/sciadv.aeh3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