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가 과학 논문을 쓰는 풍경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상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의생명 분야 영문 논문 10편 중 9편에서 AI를 이용해 글을 쓰거나 다듬은 흔적이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한국 논문에서 AI 사용 추정률이 가장 높았다.
독일 튀빙겐대 레나 홀츠바르트 연구원과 벨기에 겐트대 드미트리 코박 교수 등 연구팀은 미국 국립보건원이 운영하는 의생명 논문 저장소 '펍메드 센트럴'에 실린 영문 논문 119만4287편을 분석한 결과를 최근 논문 사전공개 사이트 '아카이브'에 공개했다.
연구진은 챗GPT 같은 대형언어모델(LLM)이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이 논문에서 얼마나 늘었는지를 추적했다. 챗GPT가 등장하기 전 단어 사용 빈도를 기준으로 삼아 이후 갑자기 많이 등장한 표현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AI 사용 추정률은 2023년 19%에서 2024년 52%, 2025년 77%로 빠르게 높아졌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89%에 달했다.
논문의 어느 부분을 쓰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났다. 지난해 12월 논문의 '고찰'(연구 결과의 의미를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78%에서 AI 사용 흔적이 나타났다. 반면 연구 방법 부분에서는 54%였다. 연구 결과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부분보다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으로 풀어내는 부분에서 AI 흔적이 더 많이 나타난 것이다.
국가별로도 차이가 났다. 연구진이 논문 수가 많은 20국을 비교한 결과, 2025년 AI 사용 추정률은 한국이 85%로 가장 높았다. 중국이 82%, 대만이 80%로 뒤를 이었다. 반면 영국은 28%, 미국은 39%였다.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국가들은 평균 37%였지만, 나머지 국가는 72%였다.
연구진은 이 차이가 비영어권 연구자들이 AI를 많이 사용하는 것과 관련 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연구자에게 AI는 번역뿐 아니라 어색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교정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 논문에서 연구진이 분석한 특정 영어 표현의 사용 빈도는 2022년엔 영어권보다 크게 낮았지만 2025년에는 거의 비슷해졌다. AI가 과학계의 '영어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분석에서 나타난 논문에서 AI를 사용하는 추정치는 기존 연구보다 훨씬 높다. 같은 연구진이 지난해 펍메드 논문의 초록만 분석했을 때는 2024년 논문의 최소 13.5%에서 AI 사용 흔적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진은 당시 방법이 AI 사용량의 '최소치'를 잡아내는 방식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AI 사용을 더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는 새 분석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응답자 71%가 논문 작성 과정에서 AI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AI가 비영어권 과학자의 진입 장벽을 낮춘다는 장점이 있지만 우려도 있다. AI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나 논문을 만들어내는 '환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 결과를 서술하는 부분까지 AI 사용이 확산되면 잘못된 정보가 논문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특정 분야의 서론과 고찰이 비슷한 AI 모델을 거쳐 작성될 경우 AI가 가진 편향이 학계 전체의 논의에 반복적으로 반영될 가능성도 있다.
AI가 만든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면 연구자가 자신의 논리에서 허점을 발견할 기회까지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학술지들이 논문 작성 과정에서 AI를 사용했을 경우 그 용도와 범위를 밝히도록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연구진은 "생각과 씨름하고 이를 말로 옮기는 것은 과학 연구의 필수적인 과정"이라며 "AI에 논문 작성을 의존하면 이 중요한 과정이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