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과 뼈까지 암이 퍼지고 항암제마저 듣지 않던 60대 남성이 뜻밖의 계기로 암에서 벗어났다. 암과 상관없는 심장 수술을 받은 뒤 몸속 종양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대신 이전에는 없던 심각한 벌독 알레르기가 생겼다. 연구진은 심장 수술이나 감염을 계기로 이 남성의 면역 체계에 '리셋'이 일어났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호주 애들레이드대 포 리우 교수와 로열애들레이드병원 마이클 브라운 교수는 최근 이런 사례를 국제 학술지 'BMJ 케이스 리포트'에 발표했다.
호주에 사는 60대 농부 A씨는 가슴에서 악성 피부암인 흑색종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8개월 뒤 심장 대동맥판막이 좁아지는 대동맥판막협착증을 검사하던 중 왼쪽 겨드랑이에서 암의 흔적이 발견됐다. 추가 검사를 해보니 흑색종은 이미 여러 림프절, 간, 왼쪽 허벅지뼈까지 퍼져 있었다.
A씨는 표적 항암제를 복용했지만 심한 간 손상 등 부작용 때문에 두 달 만에 치료를 중단해야 했다. 종양은 줄이지 못한 상태였다. 대동맥판막협착증까지 악화돼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고, 수술 뒤에는 세균 감염까지 생겼다.
그런데 두 달 뒤 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한 영상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몸 곳곳에 있던 종양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별도 추가 항암 치료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A씨는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놀랐고, 충격을 받았고, 안도했다"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연구진은 심장 수술로 인한 조직 손상과 뒤이은 감염이 면역 체계를 강하게 자극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수술 부위에서 염증 물질이 대량 분비되면서 평소 암세포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던 면역세포가 갑자기 활성화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면역 체계에 변화가 있었다는 또 다른 단서는 2년 뒤 나타났다. A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꿀벌에 수십 차례 쏘이고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심장 수술 이후 다시 벌에 쏘였을 때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급성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를 일으켰다. 전문가들은 새로 생긴 벌독 알레르기가 면역 체계에 변화가 생겼다는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번 사례는 환자 한 명에게서 나타난 이례적 현상으로, 심장 수술이 암을 치료했다는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큰 수술 뒤 면역 기능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암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연구가 많다.
그럼에도 수술이나 조직 검사 뒤 흑색종이 자연적으로 줄어든 사례가 70건 넘게 보고된 점은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한 여성의 팔에 생긴 종양을 조직 검사한 것이 면역 반응을 촉발해 종양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보고됐다.
연구진은 "바이러스나 백신, 또는 수술처럼 신체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경우 비정상적인 면역 반응이 항암 면역 반응을 크게 바꿔 예상치 않게 종양을 퇴행시킬 가능성은 알려져 있다"고 했다. 일부 환자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밝혀내면, 새로운 암 치료법을 찾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