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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 '인페르노'에서는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치명적 바이러스를 설계하는 과학자가 등장한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바이러스를 전 세계에 퍼뜨려 인구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바이러스 설계'에 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미국 연구진이 AI로 바이러스의 DNA(유전정보를 담은 물질) 설계도를 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짜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바이러스는 세균이나 동식물 등 생물의 세포를 이용해 증식하는 존재다. 무해한 것도 있지만, 에볼라·신종 코로나·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처럼 숙주를 병들게 하는 것들도 있다. AI가 설계한 바이러스를 이용해 수퍼박테리아(항생제가 통하지 않는 세균) 치료제를 만드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한편,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 개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AI가 쓴 DNA, 실제 바이러스로 탄생

미국 스탠퍼드대와 아크연구소 공동 연구진은 AI가 생성한 DNA 설계도로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고, 실제로 증식하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7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진이 만든 바이러스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다. 세균(박테리아)을 '먹어치운다(phage)'는 뜻으로, 세균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다. 단세포 생물인 세균에 자신의 DNA를 집어넣고 그 안에서 증식한다.

연구진은 '이보(Evo) 1'과 '이보 2'라는 AI를 사용했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원리를 DNA에 적용한 모델이다. DNA는 아데닌(A)·티민(T)·구아닌(G)·시토신(C)이라는 네 가지 염기가 길게 이어진 분자다. 염기의 배열 순서에 따라 유전정보가 달라진다.

챗GPT가 수많은 문장을 읽어 '어떤 단어 다음에 어떤 단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가'를 배운 것처럼, 이보는 방대한 DNA 서열을 학습해 바이러스의 패턴을 터득했다. 이를 통해 예컨대 'ATGCCATGACCT…'와 같은 새로운 A·T·G·C 배열을 생성해 냈다. 즉,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바이러스의 '디지털 설계도'를 써낸 것이다. 연구진은 "생성형 AI를 이용한 완전한 박테리오파지 유전체(게놈) 설계의 첫 사례"라고 밝혔다.

◇내성 가진 대장균도 제압

연구진은 대장균을 감염시키는 천연 박테리오파지 'ΦX174(파이엑스174)'를 기본 틀로 삼았다. DNA가 약 5400개의 염기로 이뤄져 있는 비교적 단순한 바이러스다. AI는 이를 참고해 염기 배열이 서로 다른 수많은 바이러스 DNA 설계도를 만들었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실제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 약 300개를 추렸다. 이어서 AI의 설계도대로 실제 DNA 분자를 화학적으로 합성해 제작했다.

이렇게 만든 DNA는 대장균 세포에 집어넣어 실제 바이러스가 만들어지는지 확인했다. 약 300개에 달하는 바이러스 설계도 중에서 16개가 실제로 대장균 안에서 증식에 성공했다. 천연 바이러스보다 강하게 대장균 증식을 억제한 결과도 일부 나왔다. 기존의 바이러스 공격을 견디도록 진화한 대장균도 AI 설계대로 만든 바이러스들로 제압했다. 연구진은 세균이 내성을 갖더라도, AI로 새로운 바이러스를 빠르게 설계해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AI 설계 바이러스의 두 얼굴

가장 먼저 기대되는 활용 분야는 질병 치료다. 특히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세균 감염을 치료할 대안으로 주목받을 전망이다. 환자를 감염시킨 세균의 특성을 AI가 분석한 뒤 그 세균을 공격하는 맞춤형 바이러스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연구진도 "이번 기술이 빠르게 진화하는 병원균에 맞서 새로운 치료제를 만드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같은 기술이 정반대 방향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연구진도 "AI를 이용한 새로운 바이러스 유전체 생성 기술이 생물 보안 문제를 제기한다"고 밝혔다. 특정 국가나 범죄 세력이 인간에게 전염성과 치명률이 높은 바이러스를 개발해 '생물학 무기'로 만드는 데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학계에서는 이 때문에 AI 모델뿐 아니라 DNA 합성 단계에서도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위험한 병원체와 유사한 DNA 합성 주문이 들어오면 걸러내고, 고위험 바이러스의 설계를 제한하는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6월 오픈AI, 앤스로픽, 구글 딥마인드 등 주요 AI 기업 최고경영자들도 미 연방의회에 'AI를 활용한 생물학 무기' 제조를 막기 위한 규제를 도입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이 서명한 입법 촉구 서한은 DNA 등을 합성해 주는 기업들이 고객의 주문을 사전에 검사하고 위험이 확인되면 차단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테리오파지

세균(박테리아)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세균에 달라붙어 자신의 DNA 등을 집어넣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복제(증식)한다. 일부는 그 과정에서 세균을 터뜨려 죽인다. 박테리오파지는 종류마다 감염시킬 수 있는 세균이 달라, 특정 세균을 골라 공격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항생제 내성균을 제거하는 치료법이 연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