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옆 차와 간격이 줄면 바로 경고음이 나온다. 고래도 비슷할지 모른다. 선박이 근처에 있으면 고래가 내는 노랫소리가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선박과 부딪혀 죽는 고래가 늘면서 스스로 선박에 대한 경고음을 내는 자구책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티(CETI·고래 번역 이니셔티브) 연구진은 바다에서 향고래가 뱃소리를 들으면 특정한 패턴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확인했다. 향고래는 어미가 새끼를 부르거나 암수가 짝을 찾을 때 마우스 버튼을 누를 때 나는 딸깍(click) 소리를 낸다. 배가 오면 평소와 다른 딸깍 노래를 부른다는 말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지난달 18일 국제 학술지 '생태 정보학'에 실렸다.
◇선박 접근하면 향고래 노랫소리 바뀌어
향고래는 몸길이가 15m이고 몸무게가 50t에 이르는 대형 고래이다. 범고래나 돌고래처럼 이빨로 먹이를 무는 이빨고래류 중 가장 크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향고래 같은 대형 고래가 부르는 노래에 매혹됐다. 과학자들이 고래가 내는 소리를 노래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음높이와 리듬을 가진 소리가 일정한 패턴으로 길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시립대의 데이비드 그루버(David Gruber) 교수가 이끈 세티 연구진은 4년간 카리브해 섬나라인 도미니카 해안에서 향고래 15마리의 등에 센서·마이크 장치를 부착해 위치를 확인하고 노랫소리를 녹음했다. 근처를 지나는 선박의 엔진이나 프로펠러 소리도 같이 녹음됐다. 동시에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정보로 실제로 해당 해역을 오가는 선박의 경로를 확인했다.
세티 연구진은 향고래가 내는 딸깍 노랫소리를 21가지로 구분하고 이를 코다(coda)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1+1+3' 코다는 딸깍, 딸깍 두 번 소리를 내고 잠시 멈춘 다음 세 번 연속으로 딸깍 소리를 내는 식이다. 향고래의 코다는 21가지밖에 없지만, 리듬과 박자를 바꾸거나 장식음을 붙이는 식으로 패턴이 300가지 이상으로 늘어난다.
연구진은 도미니카 섬의 향고래가 무리 고유의 1+1+3 코다 소리를 냈지만, 배경음에 선박 소음이 들리면 노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딸깍 사이의 간격도 줄어들었다. 특히 배가 지나가면 모음 a 코다 비율이 높아지고 소음이 없으면 i 코다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타났다. 물론 모음 코다라고 해서 향고래가 사람처럼 '아, 이'라고 발음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주파수에 있다.
사람의 모음은 입과 목의 공명 구조에 따라 특정 주파수가 두드러진다. 마찬가지로 향고래의 코다에도 고음부터 저음까지 여러 주파수가 섞여 있는데 유독 에너지가 한 주파수 대역에 몰리는 스펙트럼 봉우리가 나타난다.그중 a 코다는 스펙트럼 봉우리가 하나이고, i는 두 개인 것을 말한다.
◇소리 전달력 높였거나 경고음일 수도
세티는 인공지능(AI)으로 고래 노래에 담긴 뜻을 해독하는 국제 연구 프로젝트이다. 그루버 교수가 자선 단체에서 3300만달러(약 481억원)를 기부받아 2020년 출범시켰다. 이름은 지적 외계인 탐색 프로젝트인 세티(SETI)를 모방했다.
앞서 세티 연구진은 2024년 향고래의 노랫소리에서 알파벳에 해당하는 코다 21가지를 밝혀냈으며, 지난 4월에는 코다에 모음 a와 i 유형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노랫소리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루버 교수는 "이번 연구는 고래들이 선박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선박이 주변에 있어 목소리에 영향을 준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향고래가 선박을 감지하고 경고음을 냈거나 아니면 시끄러운 곳에서 목소리가 높아지듯 선박 소음을 극복하기 위해 노랫소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미 해군 연구진은 앞서 2020년 밍크고래는 소음 공해가 있으면 음량을 높인다고 발표했다. 범고래와 혹등고래도 같은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세티 연구진은 향고래는 단순히 음량을 높이기보다 발성 속도와 유형까지 바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경고음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향고래는 19세기부터 선박을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졌다.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이 1851년 발표한 소설 '모비 딕'의 주인공이 바로 향고래이다. 실제로 27m 길이의 범선형 포경선인 미국 에식스호는 1820년 11월 20일 남태평양에서 향고래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모비 딕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다.
지금은 소설과 반대로 향고래가 위험한 상황이다. 전 세계에서 매년 고래 2만 마리가 선박 충돌로 죽는 것으로 추정된다. 2050년까지 전 세계 해상 교통량이 최소 240% 증가한다고 예상하는 만큼 고래와 선박 충돌 사고는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과학자들은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고래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이를 선박에 알려 항로를 바꾸게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향고래들이 서로 선박이 다가온다고 경고한다고 밝혀지면 앞으로 이를 이용해 갈수록 증가하는 고래와 선박 간 충돌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선박에게 고래가 있다고 알렸다면, 앞으로는 고래에게도 선박 접근을 알리는 경고음을 그들의 노랫소리로 들려줄 수 있을지 모른다. 명실상부한 쌍방향 충돌 경고 시스템이 마련되는 셈이다.
참고 자료
Ecological Informatics(2026), DOI: https://doi.org/10.1016/j.ecoinf.2026.103881
Proceedings B journal(2026), DOI: https://doi.org/10.1098/rspb.2025.2994
Nature Communications(2024),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4-47221-8
Journal of the Acoustical Society of America(2020), DOI: https://doi.org/10.1121/10.0000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