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같은 두족류(頭足類) 형태의 외계 생물이 피부색을 바꾸고 촉수를 움직이자, "이게 움직였나요?"라는 뜻의 문장이 완성됐다. 피부색과 촉수 변화 등을 인간 언어의 자음과 모음처럼 조합해 만들어낸 새로운 언어로 만든 말이다. 인공지능(AI)이 "소리 대신 색과 몸짓으로 소통하는 생명체의 언어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설계한 '가상의 언어'다.
미국 카네기멜런대와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등 국제 공동연구팀이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이용해 발음 체계와 문법, 어휘를 갖춘 인공 언어를 만드는 AI '콘랭크래프터(ConlangCrafter)'를 개발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콘랭은 인공 언어를 뜻하는 말이고, 크래프터는 제작자를 의미한다.
영화 '아바타'의 나비어, 소설 '반지의 제왕'의 엘프어처럼 가상 종족의 언어를 설계하는 데 활용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AI끼리 사용하는 전용 언어가 등장해 인간이 파악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AI가 언어를 '설계'하다
인공 언어는 특정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언어다. 국제 공용어를 목표로 만든 '에스페란토'가 대표적이다. 폴란드 출신 안과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는 약 10년에 걸쳐 개발한 에스페란토를 1887년에 공개했다. 이처럼 언어를 새로 만들려면 발음과 문법, 어휘를 일관되게 설계해야 해 최소 수년이 걸린다. 기존 AI에 "새 언어 하나를 만들어라"라고 지시해도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다.
이번 연구팀은 언어 제작을 여러 단계로 나눴다. AI는 먼저 자음과 모음, 성조 등 소리의 체계를 정한다. 이어 주어·동사·목적어의 순서, 시제와 복수 표현 같은 문법을 만든다. 다음에는 앞서 정한 소리 규칙에 맞춰 기본 단어를 만들고, "큰 개가 자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물을 줄 것이다" 같은 문장을 새 언어로 만들어낸다. 각 단계에서는 비평가 역할의 AI가 오류와 모순을 찾고, 편집자 역할의 AI가 이를 수정하는 과정을 최대 10차례 반복해 새 언어를 완성하는 방식이다.
언어 개발 AI 콘랭크래프터는 모음만으로 말하는 언어와, 색깔과 촉수 움직임으로 뜻을 전달하는 가상의 외계 생명체 언어도 만들었다. 다만 콘랭크래프터가 개발한 언어의 완성도는 아직 낮다. 문법의 일관성이 낮아 아직은 인간의 언어에 비할 순 없는 단계다. 일각에선 "언어 창조가 아니라 인간 언어에 존재하는 특징들을 AI가 주사위를 던지듯 무작위로 섞어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반면 AI가 단어를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언어의 규칙을 설계하고, 실제 문장에 적용하고, 오류까지 고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AI가 인간의 말을 배우는 단계를 지나, 말의 체계 자체를 조립하는 단계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 AI만의 '은어' 등장할까
콘랭크래프터 연구팀이 구상하는 다음 단계는 여러 AI에 같은 인공언어를 가르친 뒤, 서로 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AI들이 대화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단어나 줄임말을 만들고, 기존 단어의 뜻과 문법을 바꾸는지 관찰할 계획이다. 인간 언어가 공동체 안에서 진화하는 과정을 AI 집단으로 모의실험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이에 대해 AI 고유 언어가 자연 발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번 콘랭크래프터 개발 이후 머지않아 AI가 자기들만 알아듣는 은어를 만들거나, 외계어 같은 배타적 언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여러 AI가 협력해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는 '멀티 에이전트' 기술이 확산되면, AI들 사이에서 사람이 곧바로 알아보기 어려운 축약 표현이나 통신 규칙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가 새로운 언어를 빚어내는 기술은 단순한 창의성 실험 차원이 아니라 인간과 AI의 공존을 좌우하는 사안이 될 수 있다"며 "AI 투명성과 안전성 연구가 더욱 주목받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이번 연구가 인간이 해독할 수 없는 AI 전용 언어의 출현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콘랭크래프터가 만든 언어에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문법 설명과 단어 목록이 있다. 연구팀은 이 실험의 목적이 AI를 감시 없이 대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AI가 새 언어의 규칙을 배우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관찰하려는 데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