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석(왼쪽) 포스텍 교수가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스웨덴 우메오대에서 열린 노벨 심포지엄에서 200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프랭크 윌첵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노준석 교수 제공

"노벨상 본고장에 가보니, 왜 한국은 못 받고 일본은 많이 받는지 알게 됐습니다. 연구 실적은 밀리지 않는데, 결국 네트워크 때문이었습니다."

투명 망토를 꿈꾸며 자연에 없는 인공적 성질을 갖는 '메타물질' 연구에 뛰어든 공학도가 노벨상의 본고장에 세계적 석학으로 초청받았다. 노준석(45) 포스텍 교수는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스웨덴 우메오대에서 열린 노벨 심포지엄에서 메타물질 대량 생산 연구를 발표했다. 노벨 심포지엄은 노벨상을 주는 노벨재단이 1965년부터 여는 최고 권위의 국제 학술대회다. 세계적 돌파구가 나타나는 분야 석학들을 엄선해 초청하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 분야를 미리 가늠하는 풍향계로도 통한다. 올해 주제는 메타물질과 양자컴퓨팅이었다.

지난 7일 본사에서 만난 노 교수는 "내가 학부생일 때 이미 세계 석학 반열에 오른 분들이 앉아 있었다"며 "내가 와도 되는 자리인가 싶었다"고 했다. 그는 초대 받은 메타물질 분야 석학 25명 최연소 연구자였다. 노벨 심포지엄에 초청받은 한국 연구자로는 두 번째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노벨상도 사람 마음 얻어야 하는 상"

노 교수가 주목한 것은 노벨상이 실제로 정해지는 방식과 문화였다. 그는 "노벨상은 스웨덴 한림원 회원들이 저마다 연구 주제와 후보를 발제하고, 한 사람씩 투표하는 구조였다"며 "연구 잘하는 건 기본이고, 결국 여러 사람의 입김이 중요하더라"고 했다. 논문 점수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을 얻어야 하는 상이라는 것이다.

이 게임의 룰을 아는 나라가 일본이다. 노 교수는 "상당수 스웨덴 교수들이 일본에 장기 체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구 성과와 연구자를 접하는 관계가 쌓인다"며 "그래서인지 스웨덴 학계는 일본에 호의적이다"이라고 했다. 일본이 꾸준히 키워낸 학계 네트워크가 노벨상을 많이 받는 배경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국내 연구자 중에도 실력과 성과는 이미 충분한 분이 많다"며 "노벨상 후보로 추천받으려면 오랜 시간 네트워크를 쌓아야 하는데, 한국엔 그 판이 아직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에서 만난 노준석 포스텍 교수는 "노벨상 본고장에 가보니, 왜 한국은 못 받고 일본은 많이 받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노 교수의 초청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돕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야 하느냐'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정부도 지원 의지는 있지만 뾰족한 방법론이 없던 것이다. 그는 "일본처럼 될 만한 학자를 일찍 알아보고 판을 깔아주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유력 후보군을 꾸준히 관리하고 스웨덴 학계와 교류하는 생태계를 국가가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물회 한 그릇이 부른 초청장

노 교수의 초청 과정은 이런 문법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초 일면식도 없는 스웨덴 교수가 "내일 포항을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연락해왔다. 마침 일정이 맞았던 노 교수는 연구실과 메타물질 생산 설비를 보여주고 물회 한 그릇을 대접했다.

몇 달 뒤 노벨 심포지엄 초청장이 날아왔다. 노 교수는 "뒤늦게 그 교수가 미쉐린 심사위원처럼 암행 평가를 했다는 걸 알았다"며 "시간을 내 만나지 못했다면 초청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우연만은 아니었다. 노 교수는 학술지 동료 평가(피어 리뷰) 요청을 거의 거절하지 않는다. 그는 "주변에서 시간 낭비라고 말리지만 10년을 쌓으니 그게 평판이 되더라"며 "어디든 부르면 가서 발표하고 도움을 주다 보니 결국 돌고 돌아 내게도 도움이 됐다"고 했다.

올해 노벨 심포지엄에 초청된 세계 석학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노준석 교수 제공

◇"메타렌즈 제품 터지면 노벨상 결판"

노 교수는 외고를 나와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과학고 출신에 밀린다는 생각에 변리사를 준비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투명 망토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뉴스를 보고 메타물질 연구에 뛰어들었다. 빛을 자유자재로 꺾어 투명 망토를 구현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끌린 것이다. 하지만 메타물질은 20년 넘게 "너무 비싸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판을 바꾼 것이 노 교수팀이다. 포스코그룹 지원을 받아 2021년 렌즈 형태의 메타물질인 메타렌즈 대량 생산의 길을 열면서 "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인식이 학계에 퍼졌다. 올해는 메타렌즈 생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비용은 절감하는 기술을 개발해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노준석 교수팀이 안경 없이도 2D와 3D를 자유자재로 볼 수 있는 전환형 메타렌즈 디스플레이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가 준비하는 대표 응용처는 AI(인공지능) 안경이다. 기존 렌즈보다 월등히 얇고 가벼우면서 광학 성능은 뛰어난 메타렌즈가 머지않아 상품성 있는 증강현실 기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올해 말 미국 실리콘밸리에 창업해 구글·메타 같은 빅테크의 AI 기기에 경량화 렌즈 소재를 공급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노벨 물리학상은 '첫 발견'을 중시하지만, 상용화가 수상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노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심포지엄에서 '제가 상용화에 성공해야 어르신들이 노벨상을 받는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며 "메타렌즈가 들어간 AI 안경이 성공하면 이 분야에서 노벨상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포스텍 캠퍼스 '노벨동산'에는 주인 없는 좌대가 서 있다. 이 학교가 배출할 첫 노벨상 수상자의 흉상을 위해 비워둔 자리다.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한 노벨상 수상자가 노벨상을 받으면 1년에 300일을 초청받아 세계를 다닐 수 있다고 자랑하더군요.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